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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Feb 10. 2022

형제는 경쟁자이다

뱃속에 있는 둘째는 이제 슬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지만 이미 세상에 태어난 첫째와 엄마라는 자원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것 같다.


둘째의 임신은 첫째만큼 극적이지 않다. 아무래도 한 번 경험해 본 일이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기도 하고, 또 앞으로 겪을 고생들(입덧, 막달의 불편한 거동, 출산, 육아 등)이 훤히 보이기 때문에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이미 엄마의 에너지를 많이 뺏고 있는 첫째라는 존재 때문에 둘째는 삶의 초기부터 그 기반이 약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일까. 첫째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성가신 존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임신 이후에 분비되는 다량의 여성 호르몬 때문일까.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기 때문일까. 몸은 항상 나른하다. 거기다 입덧까지 있는 경우엔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하는 일 전부가 너무 괴로운 일이 되어 버린다. 나 역시 입덧은 거의 없었지만, 졸린 몸으로 첫째를 케어하는 것이 좀 버거웠다.


언젠가 남편에게 첫째가 가끔 너무 밉다고, 뱃속에 있는 동생을 벌써부터 질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나의 태도가 둘째의 생존 전략이 영향을 미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둘째는 엄마의 몸을 피곤하게 함으로써 신체적 컨디션을 떨어뜨린다. 임신부가 잠을 푹 자야 태아도 잘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첫째를 적절히 양육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


아직은 엄마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의 첫째이다 보니(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 해도 물론 첫째는 엄마에게 서운할 것이다.), 가끔은 둘 다 너무 힘들어질 때가 있다. 이 때 뱃속의 둘째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이제야 어렴풋이 부모의 사랑이 어느 누군가에게 편파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형제는 기본적으로 경쟁자적 구도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평등한 사랑이나 형제간의 우애는 그런 사실들을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아이를 하나만 낳기로 결정했다면 이런 사실들을 몰랐을 것이다. 외동으로 자란 자식은 부모 사랑의 편파성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임신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인생의 진실을 더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닌 부족함, 그리고 살면서 저지를 수 있는 다양한 잘못들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인 것 같다.


가끔 맘카페를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둘째 고민’은 아마 내가 현재 가장 사랑하는 첫째라는 존재에게 전적으로 사랑을 줄 수 없게 하는 둘째라는 존재가 두렵기도 하면서 거스를 수 없는 본능(아마도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감, 외동인 자식이 혹시라도 잘못되어 일찍 사망할 경우에 대한 불안감, 가장 원초적으로는 번식욕 등)을 무시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확실히 둘째의 존재는 첫째에 대한 사랑을 앗아가는 측면이 있는  같다. 하지만 인간은 경쟁을 함으로써 발전을 한다. 자식이 많았던 우리집은 부모의 사랑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놓고  많은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공부를   하거나, 부모 말을  듣거나, 반찬 투정을 하지 않거나 하면서. 지금은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경쟁하는  같다. (아닌가?) 따라서 형제는 경쟁자이지만 인생의 발전에 어느 정도 자극을 주는 선의의 경쟁자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이의 강점이 있다고 본다.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달걀을  바구니에 담지 않은 합리적인 투자의 결실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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