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가 콤플렉스인 나의 엄마 정님 씨는 신발도 남다르다.
팔십 둘이지만 여전히 5센티미터 굽 구두를 신고 3센티미터 펌프스 힐의 빨간 샌들을 신는다.
운동화를 신을 때도 굽이 있는 걸 고르다 보니 사기가 여간 쉽지 않다.
지난해 봄 정님 씨는 여행을 앞두고 새 운동화를 사기로 했다.
동생과 함께 백화점을 몇 바퀴 돌다 고른 신발은 결국 연한 핑크색 등산화였다.
정님 씨 생각에 모양도 이쁘고 등산화 자체 바닥도 약간 높아 신어보니 키가 살짝 커졌다.
함께 간 동생은 등산화가 발바닥이 딱딱해 평지 걸을 때 불편할 것 같다고 말렸다.
게다가 사이즈도 230mm뿐이었는데 평소 정님 씨는 235mm를 신는다.
동생이 등산화나 운동화는 약간 큰 걸 신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이미 핑크색 등산화에 마음이 꽂힌 정님 씨는 결국 K2 등산화를 샀다.
230mm인데도 이 신발은 크게 나왔는지 235mm를 신는 정님 씨 발에도 여유 있다며 좋아했다.
일주일쯤 뒤 정님 씨는 자식들을 이끌고 강원도 화천 백양산 케이블카 전망대를 갔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함께 가자고 했는데 못 가보고 돌아가셨다며 정님 씨라도 '죽기 전에'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조른 것이었다.
핑크색 등산화를 신고 벙거지 모자를 쓴 정님 씨는 새벽에 출발해 장장 3시간이 넘는 강원도 일정에 체력이 부쳤다.
차 안에서부터 신발이 꽉 낀다는 등 산길이 너무 구불구불해 멀미가 난다는 등 전망대 도착 전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전망대 일정은 사실 많이 걷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정님 씨는 등산화가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동생이 혹시 신발 안에 키높이 깔창 넣은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단칼에 부인했다.
그러면서 신발이 딱딱하고 발가락 앞부분이 쓸려 너무 아프다는 거였다.
백양산 전망대와 평화의 댐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정님 씨는 등산화를 바꿔야겠다고 선언했다.
두 번밖에 안 신었다는 분홍색 k2 등산화는 발이 가장 작은 내게 돌아왔다.
무려 21만 원 현금을 주고 샀는데 불편해 새 운동화를 사야 한다니 나도 공짜로 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필요하지도 않은 새 등산화를 갖게 되었고, 정님 씨는 모양도 높이도 비슷한 연회색 아이더 등산화를 새로 샀다.
부루퉁하니 딸내미한테 하소연하니 할머니와 동거 중인 딸내미가 은밀히 속삭였다.
엄마, 내가 봤는데 할머니 등산화에 키높이 깔창 들어있어.
그거 한 2센티미터는 될걸.
할머니한테 깔창 넣으면 발 쏠려서 아플 거라고 말했는데 안 아프다고 괜찮다고 하셨어.
헐!
그 후 새로 구입한 연회색 아이더 등산화를 신은 정님 씨와 함께 홋카이도 여행을 간 나는 내내 한방을 썼다.
그리고 호텔에서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키높이 깔창이 들어있는 걸 알았다.
여전히 발이 불편한 정님 씨는 버스 안에서 살짝 신발을 벗고 발가락을 주무르곤 했다.
패키지여행인 만큼 안 걸을 수는 없으니 많이 걸어서 힘들고 버거웠을 텐데 결코 키높이 깔창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생이 장난스럽게 "엄마, 키높이 깔창 넣었어?" 하고 물었을 때도, "아니"라며 자연스럽게 부정했지만
정님 씨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기로 한 나와 동생은 웃으며 넘어갔다.
걷기 불편해도 키높이 깔창은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엄마 정님 씨.
키높이 깔창은 정님 씨의 시크릿 자존심이다.
TMI
그 후 나는 친구들과 부산에 놀러 가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밤에 신발을 벗었는데 왼쪽 엄지발가락이 얼얼하게 아팠다.
양말을 벗어 보니 엄지발가락 한쪽이 시퍼러둥둥 부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 어디서 부딪혔나?"
친구들도 잘 생각해 봐라. 그 정도 멍이면 크게 부딪혀서 아팠을 것 같은데 하며 걱정해 줬는데,
다음 날 저녁 절뚝절뚝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사실,
정님 씨가 나 몰래 운동화에 키높이 깔창을 넣었더라.
그것도 모르고 운동화가 갑자기 꽉 낀다고 느낀 나는 엄지발가락에 커다란 멍이 들어 일주일을 고생했다.
엄마 닮아 키가 작은 큰 딸을 염려한 정님 씨의 소소한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