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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둥 Apr 26. 2022

밥맛 예찬

잃어버린 밥맛을 찾아서

코로나로 인하여 사내 헬스장이 폐쇄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내 몸을 극한까지 혹사 시키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기회가 사라졌다. 그때는 일주일에 두 번인 그 루틴이 그렇게 소중한 시간인 줄 몰랐다. 곧이어 우리집 문을 두드린 둘째 딸의 육아와 맞물려 수면 부족까지 겹치게 되니 운동과는 더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장은 큰 고통이 없었다. 그런대로 살만했다. 하지만 운동이 없는 상태를 2년 가까이 유지하고, 마흔을 넘기는 나이에, 신생아 육아,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업무적인 강도 등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의 위력은 내 삶을 근원부터 흔들기에 충분했다.


코로나와 함께 몰려온 이 모든 고난의 터널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에 가장 그리운 것이 있다면 단연 헬스장이었다. 운동을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아니지만 허리 통증과 만성피로의 늪을 빠져나가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시작했던 터였다. 운동 중에 전신의 땀샘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배출되는 것은 단순히 수분과 함께 몸속의 노폐물이 배출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일상 속에서 몸의 구석구석에 축적되고 압축된 긴장이 고압의 녹즙기에서 진액을 뽑아내듯 그 한순간에 배출된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반신욕을 하고 사우나를 경험한 내 근육들은 더 이상 뼈에 붙어 있을 기력조차 없다. 흐물거리는 근육들을 담고 있는 피부 가죽은 마치 비닐봉지에 가득 담은 도토리 묵을 떠올리게 된다. 이 상태로 집으로 걸어가면 평소의 2배의 시간이 걸린다.


이 모든 운동의 대미(大尾)는 운동 그 자체 있지 않다. 바로 그날 저녁에 먹는 식사에 있다. 온몸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내 몸은 영양분을 담고 있는 모든 그릇이 비어 있기에 서둘러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때는 내가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모든 미각이 부활해서 미뢰의 돌기 하나하나에 예리한 날이 선듯한 느낌이다. 세상의 모든 음식이 내 입 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존재의 본연으로 회귀한다. 잘 익은 열무김치 한 조각만 들어가도 아삭아삭한 식감과 함께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런 상태에서는 평소에 제일 좋아하 라면이 가장 푸대접을 받는다. 라면의 폭력적인 맛은 새싹처럼 움튼 미각을 짓밟는다. 반면에 평소에 젓가락의 승은(承恩)을 별로 입어보지 못한 시금치나 여러 나물들이 대접을 받는다. 미각과 함께 후각도 살아나서 평소 느껴 보지 못한 향긋함과 우적 되는 식감이 협연을 펼치는데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이 입속에서 연주되는 듯하다. 침샘에서 방울방울 터져 나오는 이 카타르시스를 주체할 수 없어 그저 황홀하다.


이 밥맛을 누군가는 매일 느끼면서 살아갈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농본 사회 속에서 살았던 선인들은 하루 종일 논이나 밭을 일구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귀가했으리라. 이윽고 차려진 푸성귀들과 막걸리 한 잔은 그 하루의 고됨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온몸으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노동이 많은 수익을 주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읽었던 양반네들 보다 항상 맛있는 밥을 먹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은 일류 호텔 중식당의 짜장면이 아니라 이삿짐을 나른 후에 배달 시켜먹는 동네 중국집 짜장면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육체적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게 되는 편리함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이 하던 일을 다른 무엇이 대체하는 것은 위험으로부터의 회피나 생산성의 향상 등 분명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이렇게 육체적 노동이 피되는 현실이 맹목적으로 찬양을 받을 만한 현상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식물이 아니기에 한 곳에 머물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고 많이 움직일수록 건강해진다. 육체적 편리함의 그늘에서 밥맛을 잃어가는 우리는 화려한 음식 사진으로 허기를 채운다. 괴물과 같은 식성을 가진 사람이 거대한 양의 음식을 먹는 영상을 보며 생리적 욕구마저 가상 체험한다. 이런 현실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가? 모두가 즐기고 있는 이 현실이 우리의 병증을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잃고 방황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아닌가?땀흘린 뒤에 음식이 이토록 맛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땀흘리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임에 틀림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 삶의 가치가 내가 흘린 땀방울의 무게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 스럽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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