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 <오셀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고인 김광석 가수의 콘서트 엘범을 들은 적이 있다. 노래 한 곡이 끝나면 관객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주저리주저리 말씀을 하시는데 본인은 환갑이 넘으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조금 뜸을 드리더니 ‘로멘스’가 하고 싶으시단다. 본인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작고 하셨지만 삶을 비관해서 자살한 사람에게도 젊은 날의 사랑은 그토록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구원의 한 조각이 아닐까 한다. 간혹 이 사랑을 평생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라 시대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출하고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어 버렸다는 망부석 전설이나,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노역에 끌려간 남편을 만나러 갔다가 죽은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해 사흘 밤낮을 통곡 했더니 만리장성 800리가 무너지고 거기서 나온 남편의 백골을 찾았던 맹강녀 전설을 보게 되면 우리의 생을 이루는 정말로 큰 하나의 축이 이 에로스 사랑임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다 알겠지만 이 에로스 사랑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여기서 언급된 4가지 사랑 중에 제일 불완전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이 에로스 사랑의 치명성을 해부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를 소환한다.
오셀로는 무어인 장군으로 흑인이다. 그는 백인으로 나이도 자신 보다 많이 젊고 아름다운 아내 데스데모나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한다. 하지만 부하 이아고의 계략으로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의 질투에 못이겨 아내를 죽이고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희곡을 단 세줄로 요약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길 바란다. 우리는 흔히 사랑은 좋은 감정이고 질투는 나쁜 감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된 모든 사랑에서 질투가 존재한다. 나중에 언급 될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아이가 다른 부모가 좋다면서 그 쪽으로 가버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우리 장모님은 세 살 손녀에게 장난감이나 다른 선물을 사주시고 나서 누가 사줬는지 두고두고 물어 보신다. 안타깝게도 손녀는 한 번도 원하는 대답을 한 적이 없지만 손녀가 자기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임에 틀림없다. 사랑 중에 가장 높은 사랑인 아가페 사랑은 어떠한가? 성경에서 그 유명한 십계명을 보자.
7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10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신명기 5장 7~10절
제 1계명부터 범상치 않다.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 2계명은 어떤가? 나를 어떤 것의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 그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그 뿐인가? 자신을 미워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에게 걸맞는 벌과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도 들어 있다. 질투는 사랑하는 이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관계를 결속력 있게 이어주는 감정인 것이다. 문제는 이 질투라는 감정이 인간의 이기심과 결탁하여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 소유욕으로 변질 되는 것에 있다. 혹은 에로스 사랑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내면의 공허함이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져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에 있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 대중 가요에서 사랑에 이르게 되는 과정만을 찬양하기에 혹은 이별의 아픔만 이야기 하기에 우리의 착각의 근거는 충분하다. 대학교 초년 시절에 첫사랑이라는 것을 했다. 내 눈에 너무 좋아 보였던 그녀가 내 여자친구 되었다는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온 세상이 밝아 보이고 황홀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고 나서 사랑으로 인해서 사라진 공허감이 다시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어리고 미숙했던 나는 여자친구에서 바보 같은 말을 남기고 결별의 단초를 제공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외로울까?” 그 때의 어리석은 나는 상대의 잘못인 줄 알았다. 저자는 이것을 ‘존재론적 질투’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내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공허함은 원래 존재했던 것이고 사랑이라는 것이 그것을 잠시 잊게 해주다가 그 한계로 인해서 다시 자각 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질투의 한 모습이라기 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인 것 같다. 뭐가 되었든 저자의 말처럼 에로스 사랑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랑으로는 상대에게 영원히 다가갈 수만 있을 뿐, 단 한순간도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로스로서의 사랑이 가진 존재론적 구조이자 한계인 거지요.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을 해야할까? 저자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 대답을 찾는다.
프롬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 함께 향유하는 사랑을 권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이지요. 이런 사랑은 ‘갖는 사랑’이 아니고 ‘하는 사랑’이며,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는 사랑’이고, ‘이기적 사랑’이 아니고 ‘이타적 사랑’입니다. 마치 뜨거운 물체에서 열이 퍼지듯, 꽃에서 향이 번지듯 그렇게 상대를 향해 스스로를 여는 사랑이지요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받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주기 위한 사랑, 하기 위한 사랑을 하라는 말이다. 참 이상적인 말인데 이기심이 팽배한 인간에게 이런식의 무조건 적인 헌신은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밀당’도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랑은 관계의 문제라 사랑을 잘 주는 법, 잘 받는 법에 대한 충분한 학습이 필요하다. 사랑을 글로 배운 친구가 실전에 취약하다고 하지만 그것 마저도 없으면 더 당혹스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