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둥 Apr 20. 2022

부서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

부서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제법 규모가 있는 부서이기에 사실 누가 입사를 하고 누가 퇴사를 하는지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입사 때는 퇴사와 달리 벽에 붙어 있는 전자 게시판에 이달의 입사자에 대한 소개글이 나온다. 게시판이 사람들의 동선이 꺾이는 벽면마다 배치되어 있고, 노출 빈도가 많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된다. 저마다 자신감 있는 표정의 사진과 입사 후 다짐들을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화면 속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요즘 입사자들은 저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별로 없고 당당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다시 보니 낯선 곳에 처음 와서 누군가가 시켜서 저렇게 자기소개를 올렸는데, 하루에도 몇 번이나 부딪히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생각이 들어 안쓰럽다. 아마도 어서 빨리 다른 게시물로 대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사실은 신입 사원은 누가 봐도 바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게시판에서 그 사람을 보지 않았더라도 오며 가며 마주쳤다면 신입사원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새 운동화를 처음 신고 밖에 나가면 무슨 옷을 입어도 새것임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바지 아래 있으면서도 한낮의 햇빛은 혼자 다 받는 듯 혼자 빛난다. 예민하던 시절에는 친구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일부러 흙을 묻혀본 기억도 있지만 그래도 새것의 느낌이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신입사원이 딱 그렇다. 이미 이곳에 오랜 시간 익숙해진 우리가 그림의 배경이라면 그는 낯선 곳의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이 역력한 주제로서 드러난다. 당분간 업무가 주어지지도 않고 마땅히 시간을 쏟을 곳도 없기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엉덩이가 뜨겁다. 그러다가 한 해, 두 해쯤 지나면 그가 어느새 나와 비슷한 색, 비슷한 분위기로 변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는 새것이었다가 헌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일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누군가였다가 그저 그런 행인 3이 되어 버린 것일까?

입사 10년 차가 된 그리 짧지 않은 경력으로 되돌아보면 아주 간혹 꽤 긴 시간 새것 같은 느낌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결국 퇴사를 하거나 부서를 옮기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낯선 공간에 머물면서 시나브로 나의 색깔이 변해 간다는 것은 적응과 조화의 한 모습인 것이다. 돌아보면 꽤 긴 시간 머물렀음에도 그곳에서 늘 스스로가 새것 같았던 장소가 내게도 있었다. 군대 시절이 그렇다. 머무는 내내 괴로웠고, 죽고 싶었던 기억도 있다. 다행인 것은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무리 속에서 허니문 기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새것으로 남는 것은 전체주의 시스템에 대한 개인의 고독한 방황으로 변한다. 그만큼 괴로운 일이다. 범위를 축소해서 나와 맞지 않는 상사, 동료, 친구, 심지어 가족… 이들에게도 나란 존재가 늘 새것으로 남겨질 수 있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움에도 심적 낯섦이 시간에 따라 지워지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조화되기 위해서는 그의 색과 나의 색이 섞여서 새로운 색을 이루어야 한다. 무지개처럼 섞이지 않는 스펙트럼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보면 무지개의 색과 색의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서로의 색이 공존할 수 있는 여백이 각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함께 할 수 있다. 그는 유화를 나는 수채화를 한 캔버스에 담으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재작년 초에 태어난 우리 둘째 아이는 요즘 늘 새것 같다. 갓 태어났을 때는 사람이라기보다 동네 장터 할머니의 비좁은 박스 속에서 꼬물거리던 강아지 같더니, 점점 자라나면서 새하얀 피부가 봄날의 벚꽃처럼 만개하고, 어눌하던 말투가 사각형 레고 블록처럼 쌓여서 문장을 이루고, 위태로웠던 걸음마는 어느새 층간 소음을 유발한다. 이런 아이의 성장은 하루하루가 새것이다. 아이가 점점 고유한 색을 찾아가기에 부모는 자신의 색으로 채웠던 곳을 지우고 여백을 만들어 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넓은 자리가 필요하다. 아이란 존재가 아직 스스로 여백을 만들 능력이 없기에 부모는 아이의 색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고달프기에 때론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부모는 어느새 체념하고 오늘도 한 귀퉁이를 지운다. 언제까지 얼마나 더 지워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내 캔버스에 내 색깔 만으로 채우려고 고집하는 것보다 내 안에 여백을 마련하고 다른 누군가의 색으로 채우는 일이 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하는 길임을 깨닫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