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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Oct 27. 2024

리쿠기엔에서 보내는 편지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당신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 근래 궂은 날씨가 이어져서 그런지, 저는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목이 갈라져서 볼품없는 목소리가 나와요. 하지만 날씨 핑계를 대면서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 그대로 가을과 겨울 내내 집에 틀어박히기 일쑤니까, 그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산책할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N이라는 친구와 함께 코마고메(駒込)에 나갔습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쌀쌀한 공기가 코 끝을 간지럽혔지만 그래도 마냥 좋아서 둘이서 깔깔 웃었습니다. 저는 여행 중에 같이 다닐 친구가 있어서 좋고, 또 N은 N대로 집 밖에 나올 구실이 생겼다고 좋아했죠. 그 친구도 꼭 저처럼 집과 학교 사이만 왔다 갔다 하는 친구거든요. 그래서인지 저 못지않게 이번 외출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저희는 리쿠기엔(六義園)을 산책했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은 저희 둘 밖에 없었어요. 일본에 살면서도 이렇게까지 한산한 리쿠기엔을 본 적은 드물어서 조금 신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해는 갑니다. 솔직히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으니까요. 땅은 온통 질척한 진흙밭이고 곳곳에 놓인 돌계단도 미끄러워서 거북이 마냥 느릿하게 걸어야 했습니다. 


리쿠기엔의 돌다리입니다. 어찌나 미끄럽던지, 친구는 "걷다가 강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리쿠기엔은 와카和歌의 여섯 가지 풍경을 모두 지녔다는 이름에 걸맞게, 빗줄기와 안개가 자욱한 풍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정취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중앙의 연못 위에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빗발쳐서 원형 파문을 그려서, 마치 수면 밑에서 잉어 떼가 입을 뻐끔거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빗방울이 나뭇잎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풀잎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시원시원한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 줍니다. 또 숲 속에서 축축한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시면 그 속에 스며든 숲의 생명력이 온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느낌마저 듭니다.


거기서 실감했습니다. 자연 풍경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리쿠기엔의 풍경을 눈으로 봤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낀 게 아닙니다. 전신으로 자연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과 정취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죠.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발 밑에 느껴지는 땅의 질감, 축축한 숲 속의 안개 냄새...... 그 모든 것이 제 몸과 딱 달라붙어 하나가 되자, 저는 그제야 리쿠기엔이라는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리쿠기엔을 왔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따라가기 벅차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 가슴이 답답할 때, 또는 유학 생활이 너무 버거워서 압사당할 것만 같을 때... 그럴 때마다 리쿠기엔은 일종의 도피처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곳을 몇 시간이고 걸어도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죠. 당시 저에게 있어서는 풍경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숨 돌리고 다시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그것만이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아님을 압니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쭉 젖혀보니 알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있는 힘껏 자연을 들이마시고, 그 흥취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리쿠기엔을 걷는 제 손에는 우산 한 개와 그 위를 적시는 빗방울의 무게 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이렇게 몸이 가벼워지고 나니 그제야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는 모양이 아니라 구름 위를 걷듯이 사뿐히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발치에 핀 자그마한 풀꽃을 위해 기꺼이 쪼그리고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거든요.


예전에는 온몸에 무게추를 주렁주렁 매단 것 마냥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잠시 잠깐 지나가는 보슬비에도 힘들어 허덕거리고, 조금만 발 밑이 질척거려도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죠.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눈물이 터져 나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우산 하나와 그 위로 떨어지는 약간의 빗방울 정도의 무게가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몸을 올곧게 펴고 또 주변을 유연하게 둘러볼 수 있을 테고, 또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손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게도 리쿠기엔의 빗소리와 안개향이 느껴지길 바라며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편지는 어디서 보내게 될지 기대되네요.


그럼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2024년 가을비 내리는 날, 리쿠기엔에서.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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