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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Oct 26. 2024

헌책방에서 보내는 편지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오랜만이네요.


저는 지금 진보쵸(神保町) 고서점가에 들렀습니다. 예전에 일본에 살고 있었을 때도 굉장히 좋아했던 곳이어서, 일본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꼭 들르려고 벼르고 있었거든요. 마을에 도착하니 길목마다 책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스며들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온 것 같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큰 고서점가'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습니다.


유학생 시절에는 진보쵸에 참 신세 많이 졌었죠. 책 값이 어디 한 두 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특히 철학 전집 같이 시리즈로 나온 책이 싼 값에 무더기로 나온 걸 보면 눈이 뒤집혀서 "이건 꼭 사야 돼!"라면서 번개처럼 달려가곤 했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늘 애용하던 헌책방이 있어요. <보헤미안 길드 ボヘミアンズギルド>라는 책방입니다. 


미리 사진을 찍어놓지 못해서 미안해요. 대신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을 보냅니다. (출처: https://jimbou.info/bookstores/ab0147/) 


책방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오렌지색 천막, 그곳이 바로 보헤미안 길드입니다.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가게 바로 앞에 중세 시대 유럽인을 본뜬 자그마한 간판이 있어서 찾기도 쉽습니다. 안은 아늑한 오렌지색 조명이 비추고 있어서 따스한 가을날, 단풍이 든 숲 속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이곳은 주로 철학과 예술에 관련된 책을 취급합니다. 그리스 희극 일역 전집, 셰익스피어 비극 해설, 무대 장치의 역사, 근대 철학 전집 등등... 어느 책장을 둘러봐도 제 취미에 딱 맞는 책들이 가득해서, 진보쵸에 올 때면 항상 이곳에 들릅니다. 개중에는 10,000엔이 넘어가는 비싼 책도 있지만 저는 대개 가게 앞에 있는 '500엔 코너'를 이용해요. 이 코너는 너무 오래되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진 책을 취급하는 데 전부 일괄 100~500엔 사이로 판매된답니다. 운 좋으면 두꺼운 철학책을 300엔으로 살 수도 있어요! 2년 전에 갔을 때는 운 좋게도 이미 절판된 책을 400엔에 살 수 있었습니다. 폴 리쾨르의 <해석의 혁신>이었죠. 나중에 메루카리(일본의 중고거래 앱)에서 찾아봤을 때는 권당 2천 엔이 넘길래 "으흠, 꽤 괜찮은 소비였잖아?"라면서 내심 으쓱했어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좋은 책을 싼 값에 살 수 있었어요. 철학책만 취급하는 서점에 가서 베르그송 <웃음>을 사고, 역사책을 주로 취급하는 곳에서는 <페스트>를, 의학 서점에서는 최면 치료에 관한 책을 샀었죠. 그 책들이 모두 커피 한 잔 값도 되지 않는다는 걸 들으시면, 당신은 아마 믿지 않을 걸요? 


어쨌든 저는 진보쵸에만 가면 정신없이 이 책 저 책 들여다보느라 하루가 다 간답니다. 농담이 아니라 오전 11시에 가서 저녁 8시까지 책만 읽었던 적도 있어요. 저자 이름도 제목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책이지만 신기하게도 고서점에만 가면 그런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라는 마음이 마구 샘솟아요. 

 

사실 대형 서점에서 그런 책들을 봤다면 아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니면 제 취미에 맞는 책만 조금 훑어보고 말았을지도 모르고요. 아마 북코너 앞에 "이번 달 신간 NO.1"이라던지, 아니면 표지 일러스트가 예쁘거나 제목이 눈길을 확 끌지 않는 이상 굳이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헌책방에만 가면 신기하게도 절로 손이 갑니다. 책에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요. 신문지나 잡지로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옛날 냄새 물씬 풍기는 책들, 표지를 들추면 황토빛으로 누렇게 바랜 속지가 버석거리면서 손끝을 스치는 감각... 알고 계시나요? 그것들을 파라락 넘기면 꼭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난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바람 소리나 풀숲 소리가 들릴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한 권의 책에는 세상이 담겨 있다는 말이 실감됩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우뚝 선 채로 목차를 훑어보고,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야, 이건 진짜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쓴 것 같아!"라던가 "이건 몰랐던 내용인데, 나중에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죠. 결국에는 그 책에 푹 빠져서 지갑을 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됩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유혹에 넘어가서 산 책들은 지금도 제 방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덕분에 이사할 때는 책 무게만 20kg가 넘어서 배달 비용이 꽤 많이 들었죠. 진보쵸에서 산 책만 해도 책장 두 층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바닥에 그대로 쌓아 뒀을 정도니까요. 


그만큼 진보쵸는 저에게 있어서 항상 기대가 되는 곳, 두근거림을 주는 마을이었습니다. 헌책이 그대로 버려지지 않고 다시금 누군가에게 읽힐 날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나요? 그리고 그 책을 집어들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언제나 발걸음이 날아갈 듯했지요.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그곳에 있다. 진보쵸로 갈 때는 항상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작은 책들을 소중히 여겨주는 곳이 있다는 것과, 그 책들과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


하지만 이번에 찾아가 보니, 진보쵸도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영화 포스터를 취급하던 가게를 기억하나요? 그 가게도 이미 문을 닫고 사라진 지 오래더군요. 아주 작은 구두닦이 방 같은 곳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 자리에 대신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섰습니다. 밖에도 자그마한 서점들은 자주 문을 닫습니다. 거대한 서점은 점점 몸집을 불리고요.


그 광경을 보고 안타까워져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당신은 일전에 "뭐, 세상은 항상 바뀌는 법이잖아?"라고 말해주셨지만, 그래도 역시 저는 바뀌지 않는 것을 사랑합니다. 쉽게 쉽게 흔들리고 바뀌는 건 싫어요. 그런 건 저 한 명으로 충분합니다. 일상 속에서 이리저리 갈대 마냥 나부끼는 제가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인데, 그곳마저 빼앗긴다면 아마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갈대가 되다 못해 픽 쓰러져버릴지도 모릅니다. 비록 예전처럼 자주 찾아갈 수는 없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 그런 변함없는 마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데...... 점점 고서점과 헌 책들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가끔 저는 헌책방의 책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속에 소중한 보배를 지닌 채 고요한 정적 속에서 버석버석 종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종종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행동에 옮겨"라는 핀잔을 듣지만, 아무래도 먼저 손을 뻗기에는 너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니까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살짝 멋쩍은 기분도 들어요. 헌 책은 적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풍취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 안에 아름다운 보배를 감춰둘 때도 있구요. "나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같은 드라마 대사가 어울린다고나 할까요. 그에 비해 나는 과연 타인을 끌어 당기는 아름다운 향취를 풍기고 있을까요? 저를 만나는 이들에게 헌 책과 같이 만남의 기쁨을 주는 존재일까요? 헌책방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저는 당신을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당신도 나에게는 헌 책과 같은 사람이었죠.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하고, 막연히 멀게만 느껴졌었죠. "과연 이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그런 불안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페이지를 한 장 두 장 넘겨보니 당신의 삶에는 분명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쓰게 웃으면서 그저 쓰라린 기억이라고, 누구나 겪는 그저 그런 일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아요, 분명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죠. 학업, 직장, 생활에서의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당신만의 말로 진솔하게 펼쳐내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발견해 낸 의미를 문장 한 구석에 조심스레 써넣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귀퉁이에 쓰인 그 작은 말들이 나에게는 힘이 되었고, 당신을 만난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저는 당신이라는 책과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당신을 펼쳤을 때 코 끝을 살짝 간지럽혔던 건, 분명히 당신이 쌓아온 지난 세월의 은은한 향기였습니다. 여기 이곳, 진보쵸에서 맡았던 냄새 말이에요.


편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운 마을에 왔더니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습니다. 그럼, 다음 마을에 가면 또 편지 쓰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2024년 어느 가을날, 간다 진보쵸 고서점가에서.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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