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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Nov 09. 2024

오오타구로 공원에서 보내는 편지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대학생 때 신세를 졌던 목사님과 만났습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요새 도쿄의 어디어디를 관광하느냐고 물으시길래 "도서관이나 공원 위주로 돌아다닙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의외라는 듯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Y씨는 일본인들도 잘 모르는 곳을 가네요! 보통 관광이라고 하면 좀 더 인기 있거나 유명한 장소에 가잖습니까."


 그 말에 저는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그야, 새롭고 특색 있는 곳을 다니는 게 여행이잖아요!" 


 그리고 거기서 말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이 편지를 읽을 당신에게 새로운 장소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기왕 일본에 왔으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 예를 들면 녹색으로 가득 찬 자연을 눈에 담고 싶었죠.


 그래서 어제는 오오타구로大田黒 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오오타구로 정원 입구.  일직선으로 난 바람길을 따라서 가슴이 탁 트이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곳은 일본의 음악 평론가인 오오타구로 모토오(大田黒元雄)의 저택이 위치한 일대를 공원으로 개조한 곳입니다. 마침 전에 들린 스기나미구립 중앙도서관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길 찾기는 수월했습니다. 


 정문을 넘어서자 제일 먼저 저를 맞이하는 것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바람길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제 가슴 한복판을 뻥 뚫고 지나갔던 바로 그 풍경입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이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려요.


 여기는 원래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잎이 물든 기색은 코빼기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풀내음 가득한 초록빛만 비치더군요. 하지만 공원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곳이 단풍 외에도 매력적인 요소로 넘치는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울창한 삼나무 이파리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햇볕,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가을 하늘, 쉴 새 없이 노래하는 시냇물과 호수 안을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들...... 자연의 아름다움이 공원의 형태를 띤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겠죠?


 

당신도 이 풍경을 즐겨주었으면 해서, 이날은 하루종일 손에서 카메라를 뗄 새도 없었답니다.


 이렇게 사방이 녹색으로 둘러싸인 곳은 한국에서 보기 드물죠? 저는 항상 그게 불만이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회색 숲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저를 재촉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빨리빨리 움직여, 빨리 성과를 내란 말이야!" 하고요.


 그런데 이곳에 오고 나서는 거짓말처럼 심신이 평안합니다. 관광이라는 일시적인 진정제가 먹힌 것도 있지만, 그것 이상으로 자연이 주는 휴식과 여유가 얼마나 큰지요. 


 여기서는 숨 돌릴 틈이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내가 뱉은 숨을 남이 들이마시고 그 악취에 얼굴을 찌푸릴 뿐입니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바람이 그 숨을 등에 태우고 말없이 날아갑니다. 처음부터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는 듯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돌아가는 자연의 틈새에 있노라면 스스로가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고 느낍니다.


 당신은 자주 "삶은 누구에게나 힘겹고 빡빡한 시간이야, 촘촘한 시간의 그물망 사이에서는 숨 쉴 틈도 좀처럼 없어"라고 말했죠.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만, 이곳에 오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꽤 많은 틈이 있다고 실감했거든요. 그것도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죠. 나뭇가지 사이로 장난치며 지나가는 바람도, 하얀 구름도, 파란 창공을 날아가는 비둘기도... 그 모든 존재가 저의 한숨을 떠나보내는 돛단배임을 깨닫는 순간, 무거웠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런 깨달음이 기간 한정제라는 사실이죠.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는 '틈'을 발견하기 어려우니까요. 아니, 어쩌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조차도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제 생활 습관 탓에 생겨난 선입견일지도 모릅니다. 그리 믿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호수를 빙 둘러 돌아가 오오타구로 자택을 들렀습니다. 사실 오오타구로 씨의 자택을 실물로 보기 전에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어요. 일본 음악 평론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명 인사가 살았던 집이니, 분명 화려한 양옥이겠거니 지레짐작했었죠.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지극히 평범한 외관이었습니다.


오오타구로 씨의 자택입니다. 생각보다 작지요?


 이만큼 화려한 정원을 만들었다면 그만큼 자택도 공들여서 지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조금 크기만 할 뿐 투박한 외형으로 지어진 집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아예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볼 정도였어요.


 조심스레 1층 응접실에 들어가자 잔잔한 피아노 음색이 흘러나왔습니다. 오오타구로 씨가 살아생전 애용했던 스타인웨이 사의 피아노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1층 응접실에는 그가 살아 생전 사용했던 피아노와 가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오오타구로는 자주 이곳에 지인을 불러서 살롱 콘서트를 열었다고 하네요. 그가 스타인웨이 사의 피아노를 흥겹게 연주하면, 손님들은 거기에 맞춰서 춤을 추거나 담배 한 개비의 여유를 즐겼겠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풍경을 만끽하면서 말이죠.


 사진 속 피아노는 1900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주인이 죽고 나서도 100년이 넘게 홀로 자리를 지켜온 피아노는 아직도 오오타구로 씨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밤마다 오오타구로 씨의 유령이 나타나서 몰래 피아노를 치거나, 다른 유령들을 불러서 한밤중의 콘서트를 열면서 생전의 추억을 곱씹을지도 모르죠? 말하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렉싱턴의 유령』에 나올법한 광경이네요.




 오늘은 하루종일 오오타구로 정원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몸은 곤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도심 속에 위치한 숨 돌릴 틈 사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까요. 언젠가 당신도 함께 왔으면 좋겠어요. 분명 갑갑했던 마음이 뻥 뚫릴 겁니다.


 편지가 당신의 일상에서 틈이 되어주길 바라며, 이번 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2024년의 어느 화창한 날, 오오타구로 공원에서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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