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는 이 편지도 어느덧 4통이나 쌓였네요. 처음에는 막연하게 근황을 보고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편지를 쓰기보다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분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하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제 여행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몸은 떨어져 있더라도 제 여행에 함께 해주는 당신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그런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펜이 춤을 춥니다. 그래서 오늘도 집을 나서기 전에 많이 고민했어요. 당신에게 조용히 편지를 쓸 만한 곳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곳일까, 당신도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문득 떠오른 곳이 바로 여기 '무사시노 플레이스'랍니다. JR 무사시사카이역(武蔵境駅)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하얀 직사각형 건물. 그곳이 무사시노 플레이스입니다. 모던한 조형과 바로 앞의 잔디밭이 예쁘게 어우러진 이곳은 '사람과 마을을 잇는 자연스러운 장소(place)'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합니다.
도서관 치고는 조금 독특한 건물이죠? 도서관이라고 하면 보통 딱딱하고 정적인 이미지, 혹은 현대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이곳은 마치 카페나 동네 쉼터처럼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건물 색깔도 하얀 게 꼭 폭신한 마시멜로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예요. 그래서 그런지,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는 도대체 무슨 용도로 지어진 곳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마을에 있는 좀 예쁜 건축물, 혹은 시민회관쯤으로만 여겼죠.
음...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사시사카이 근처에 1년을 살았는데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정말 정직하게 집-학교만 왕복하는 생활을 보내왔거든요. 하지만 오히려 그 무심함(?)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예전에 살던 마을로 돌아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건,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고요.
무사시노 플레이스는 지하 3층, 지상 4층으로 구성된 총 7층짜리 건물이에요. 그리고 각 층마다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죠. 각각 도서관, 생애학습센터, 시민활동센터, 청소년 센터라는 4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답니다. '사람, 마을, 정보의 창조'를 위한 건물이라는 이름답게 다양한 연령대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어요.
저는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 있는 도서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다른 층은 사전 예약이 필요한 곳이어서 복도 외에는 둘러볼 곳이 없었거든요. 아쉽게도 관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서 대신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이라도 첨부합니다.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어요. 앞에 책만 펴 놓고 퍼질러 자고 있는 학생 한 둘은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독서에 몰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답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았어요. 낸시 우드의 'Dancing Moons'였습니다.
정적만이 감도는 가운데 책장을 펼쳤습니다. 내용은 단조로웠습니다. 저자 낸시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류하고 자연에 둘러싸여 살면서 얻은 깨달음과 명상을 에세이와 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일상 에세이집이자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 단순한 표현과 문장들을 읽는 제 눈앞에는 광활한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가 펼쳐졌습니다. 그녀는 밤의 고요함 속에서 고독이 가진 의미를 깨우쳤고, 직접 가꾼 텃밭에서 대지가 상징하는 여성성을 느꼈고, 폭풍우를 견디는 나무의 모습에서 인내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단어로 재탄생시켰죠. 투박하고 일상 속 어디에서나 들을 법한 표현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와닿더군요.
뜬금없지만, 이런 만남이 있기에 제가 도서관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번 여행 콘셉트를 아예 '도서관과 책'으로 잡을 만큼 종이 매체에 푹 빠져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몰랐던 다양한 삶이 눈앞에 펼쳐지고, 수많은 이들이 입을 열어 자신만의 언어로 삶을 이야기하는 그곳. 그것이야말로 도서관과 책의 정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저는 저와 다른 이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지금 당신이 읽을 편지를 쓰고 있어요. 당신은 제 편지를 들고 어떤 향취를 느끼나요? 이 한 문장에 담긴 저의 삶이, 걸어온 발자취가, 그리고 그것을 엮어내는 언어의 실뭉치들이 보이나요? 언젠가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당신이 고르고 고른 언어로 로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될 날이 기대됩니다.
그런 기대를 담아 보내며, 이번 편지는 여기로 끝마칠게요. 곧 도서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네요. 저도 이만 가야 될 곳으로 떠나렵니다. 다음 편지는 또 어디서 쓰게 될지 기대되네요.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
2024년 어느 쌀쌀한 일요일, 무사시노 플레이스에서.
Y 드림
P.S. 낸시 우드의 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길래 보냅니다. 나의 약함을 위로하는 것만 같은 시예요.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
머나먼 옛날,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은 창조주에 의해 세상에 보내졌지.
아이들과 동식물, 나무와 바위, 그리고 남자들을 기르기 위해서.
남자들은 그들의 거친 본성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거절했다네.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은 온갖 사막과 산을 돌아다녔지.
의식을 일깨우고, 생존을 위한 음식과 대지를 찾아서,
그리고 이 땅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은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았지.
마치 강이나 바람처럼.
강과 바람은 그녀들에게 남자와 아이들이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쳐 줬다네.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은 수호자가 되었지.
말과 음악, 그리고 이야기들의 수호자.
그것들은 세상이 변하고 상상력이 메마를 때 새들과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이라네.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은 연민의 수호자가 되었지.
강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이어주는 그것.
여자의 마음을 가진 정령은 이 세상이 시작했을 때 간과되었던 그것, 바로 사랑 그 자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