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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Nov 02. 2024

스기나미구립 중앙도서관에서
보내는 편지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오늘은 웬일로 화창한 날씨였어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낮 기온이 24도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20도를 넘을까 말까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햇볕에 달궈진 따뜻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멀리 나가보기로 했습니다. 마루노우치선 전철로 한 시간, 종점인 오기쿠보 역에 도착해서 남쪽 방향으로 도보 25분. 그러면 오늘의 목적지가 나옵니다. 바로 스기나미구립 중앙도서관(杉並区立中央図書館)입니다.


스기나미구립 중앙도서관 정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心이 새겨진 여자 동상과 거대한 히말라야 삼나무가 인상적입니다.


이곳은 구 스기나미 도서관이었습니다. 스기나미구에만 총 13개의 도서관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도서관이 여기서 분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정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유리 창문이 늘어선 모던한 건물이 맞아줍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구로카와 기쇼(黒川紀章)가 설계한 건축물답게 조형적으로도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지 주변에는 도서관을 스케치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습니다. 확실히 건물 전체가 세련되고 깔끔한 조형이어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고 싶다면 한 번쯤 추천해 볼 만한 장소입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자료 리사이클 코너였습니다. 더 이상 도서관에서 사용하지 않는 책이나 CD 등이 자그마한 책수레 위에 놓인 채, 누군가가 자신들을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옆에는 <마음 편히 가져가세요>라는 간판이 붙어있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듯, 제가 이런 걸 그냥 지나칠 리가 없죠. 당장에 책을 한 권 집어 들었습니다.


자료 재활용 코너에서 얻은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나들이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입니다.


귀여운 개미핥기가 찻잔을 들고 있는 표지 위에는 핑크색 글씨로 <개미핥기의 도장가게印房>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목만 들어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앞부분만 훌훌 훑어보니, 대충 개미핥기가 카페 겸 도장가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사람과 만나는 이야기였습니다. 귀여운 일러스트에 걸맞게 훈훈한 내용인지라, 오랜만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책을 만난 것 같아 몹시 기뻤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은 이미 다 읽었으니까, 언젠가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게요. 당신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각설하고, 이번에는 열람실로 가보았습니다. 그곳은 벽 면이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바깥의 녹색 풍경이 훤히 보였어요. '자연과 하나 되는 도서관'이라는 표어를 내건 만큼 도서관 내부 곳곳에서도 무성한 나무와 탁 트인 잔디밭이 훤히 보였습니다. 덕분에 독서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어요. 보통 도서관이었다면 시야에는 책 아니면 사방이 꽉 막힌 벽만 보였을 텐데, 여기서는 고개만 들면 바로 눈앞에 햇빛으로 반짝이는 초록색 풍경이 한가득 펼쳐졌으니까요.


아쉽게도 관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은 보여드릴 수 없지만, 대신 그 바깥쪽 풍경을 찍어서 보냅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도서관이라는 표어가 아깝지 않습니다. 안팎으로 이렇게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도서관이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죠.


도서관 1층을 그대로 쭉 가로지르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바로 도서관 바로 옆에 있는 '책의 광장'과 '독서의 숲'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먼저 책의 광장은 야외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설치된 공간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나무로 된 책걸상이 놓여 있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니. 말만 들어도 굉장히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낭만은 요만큼도 없었습니다. 글쎄, 가을 모기가 그렇게나 득시글거릴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요... 덕분에 헌혈만 실컷 당하고 냉큼 건물 안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죠. 바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더군요. 결국 독서는 포기하고 산책이나 하려고 몸을 막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간디입니다. "일본 도서관에 왠 간디 동상이 서 있담?"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인도 국회의원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보낸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그 유명한 <7대 사회악> 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습니다.


간디가 생전에 말했던 7대 사회악: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도덕성 없는 상거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 원칙 없는 정치


개인적으로 마하트마 간디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들지만, 그의 선견지명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7개의 사회악이 현대 사회에 모조리 구현된 것만 같아 씁쓸하더군요. 누군가는 노동 없이 부를 누리고 있고, 양심 없는 쾌락의 결과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도덕성 없는 상거래로 신뢰가 사라지며, 몰개성한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의 꿈이 닫히고, 과학은 인류의 발전을 명목으로 인간성을 무시하고, 신앙은 희생과 사랑이 아닌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정치에서는 어떤 원칙 없이 오로지 힘과 세력으로 만사를 결정합니다.


저는 이 비석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과연 다음 세대는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요? 더욱 오염된 지구 환경과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될까요? 앞으로의 삶이 더욱 슬프고 비참해지면 어떡하죠? 가끔씩 영화 속 디스토피아 보다 훨씬 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면 어떡하나,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과연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들고요.


도서관에 와서 책장을 빼곡히 수놓은 책들을 바라보면 인간이 얼마나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들이 우리의 물질적인 삶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도 풍부하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다만 돈과 명예, 힘을 위해서 경주마처럼 달려 나가고 앞다투어 지식을 취하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아닐까요? 그리고 도서관에는 분명히 우리의 지견을 넓혀줄 수 있는 책들이 잠에 든 채 독자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바깥을 훤히 보이는 유리창을 앞에 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유리창과 같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내가 몰랐던 다른 이들을 들여다볼 수 있죠. 그 사람이 평소 하던 생각, 인식,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 등등, 대화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글을 읽음으로써 알게 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앎으로써 스스로의 지견을 넓히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리창이 바로 책인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새삼 다르게 보였습니다. 동시에 왜 구로카와가 이곳을 '자연과 하나 되는 도서관'으로 계획했는지도요. 어쩌면 그는 사람과 하나 되는 도서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도서관을 꿈꾼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연 속에는 필연적으로 인간도 포함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과 하나 되는 도서관은 비단 스기나미 중앙도서관뿐만 아니라 모든 도서관이 목표로 삼아야 할 모습이겠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신이 사는 마을에도 분명 도서관이 있겠죠. 그곳은 책들이 죽은 듯이 진열되어 있는 도서의 '관'인가요, 아니면 사람이 서로 이어지는 곳인가요? 누군가에게 생각의 여지를 주는 곳인가요, 아니면 그저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곳인가요?


언젠가 당신이 사는 곳에 간다면 그곳의 도서관에 가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책 속에 파묻히고 서로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당신이라는 풍경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언젠가 당신이 사는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마칩니다.


2024년 어느 화창한 가을날, 스기나미구립 중앙도서관에서.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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