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어느덧 7번째 편지를 쓰고 있네요. 그동안 쓴 편지를 하나씩 되짚어보니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구나, 여행의 테마는 잘 지켜지고 있구나 하는 감상이 밀려옵니다.
오늘은 코마고메에 위치한 동양문고 뮤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리쿠기엔 바로 근처에 있는 곳이에요.
'동양문고'라는 이름답게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아시아학 연구소 겸 도서관입니다. 세계에 딱 3권밖에 없는 예수회의 선교용 성경이나 힌두교 경전으로 유명한 리그베다의 원전 등 온갖 진귀한 서적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知の大冒険—東洋文庫 名品の煌めき—(지식의 대모험 - 동양문고 명품의 반짝임)」이라는 특별 전시회를 개최 중입니다. 리쿠기엔 입장권과 세트권으로 사면 1000엔이니, 당신도 책을 좋아한다면 꼭 한 번 들러보세요.
동양문고의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이니만큼 맨 처음에는 이곳의 역사를 연도별로 감상합니다. 동양문고는 1924년 재단법인으로 발족하고 2011년에는 일반 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여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꾸준히 세계 각국의 동양학 관련 장서를 수집해 왔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모리슨 문고>입니다.
호주 출신 저널리스트였던 G.E.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 1862년 2월 4일 ~ 1920년 5월 30일)은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팸플릿 6,000종류, 유럽 도서 24,000권, 지도판화 1,000점, 정기 간행물 120종류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판본별로 50종류, 중국방언 사전은 무려 500권 넘게 보유했다고 하니, 이쯤 되면 가히 독서광을 넘어서 수집광이라고 부를 만하죠?
게다가 그는 어찌나 성실한 사람인지, 저 많은 책을 일일이 다 기록하고 보유 목록을 작성하여 도서관 방문객들이 원하는 책을 찾기 쉽게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개인 소장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한 양이어서 후일 호주에 귀국할 때는 이것들을 일본인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에게 팔아넘겼고, 또 이와사키가 모리슨 문고를 아시아 연구 센터에 기증하면서 이를 보관하기 위해 동양문고의 전신인 동양학 도서관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호주, 베이징, 그리고 일본 이 세 나라의 합작품인 셈이죠. 그만큼 박물관 곳곳에는 동양과 서양이 한데 어우러진 요소가 군데군데 남아있습니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동서양이 이어진 것이죠.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점은 이렇게 문화도, 환경도 전혀 다른 나라들을 잇는 가교가 다름 아닌 책, 즉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계기로 무언가를 알려고 시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 계기는 단순한 호기심이 될 수도 있고, 특정한 이익을 바라는 욕심일 수도 있으며 혹은 순수하게 그 나라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경우에도 그곳을 더욱 알고자 합니다.
전자(호기심)의 대표적인 예시는 독일의 화가, 에두아르드 힐데브란트(Eduard Hildebrandt, 1818년 9월 9일~1868년 10월 25일)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프로이센 국왕의 지원을 받아 미술을 배운 뒤, 1862년부터 수년간 중동 지역, 인도, 동남아 등등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귀국 후에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여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했죠.
이하는 그의 실제 작품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은 맨 왼쪽에 있는 태국의 시암 풍경화입니다. 제가 갔던 시암은 거대한 빌딩과 백화점이 늘어서고 좁은 골목마다 가판대와 시장이 들어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대도시였습니다.
그런데 힐데브란트의 그림에서는 180도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느적느적 서쪽으로 기우는 석양을 배경으로 거대한 강이 유유자적하게 흐르고, 주변에는 온통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람이나 자동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서 있는 건 코끼리 한 마리뿐이죠.
그 외에도 카이로, 나가사끼, 마카오 등 익숙한 지명이 등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가 보고 들은 풍경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캔버스 너머로 사람 내음이 물씬 풍기고, 시장 북새통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 이런 풍경들은 차츰차츰 도시 뒤편,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정겨움과 인정 많은 풍경이 아니라 도시의 숨기고픈 치부 혹은 미개한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겨지니 말입니다. 그 점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한편으로는 저 역시 온도와 습도가 쾌적하게 유지되는 깨끗한 실내에서 유리벽 너머로 이 광경을 볼 때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거겠죠? 그걸 생각하면 힐데브란트도 저와 비슷한 기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또한 차가운 금속음과 스모그로 북적이는 자동화, 기계화의 대륙인 유럽에서 벗어나서 '여행객, 이방인'의 신분으로 아시아를 둘러보며 위안을 얻고 싶어 했으니까요.
현재는 관계가 역전되었습니다.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유럽의 자연경관을 보고 위안을 얻으려 해외로 나가죠. 그곳의 사진엽서나 액자를 사서 집에 걸어놓고 "저기 가면 숨 돌릴 틈이 생길까? 대자연을 보면 마음이 탁 트이지 않을까?"라고 자연이 주는 평안을 갈구합니다. 마치 160년의 힐데브란트가 그랬던 것처럼요.
다음으로는 역사 교과서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입니다. 세계 최초의 세계 지도나 실크 로드를 통한 동서양 문명 교류,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탐험기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연도별로 늘어섰죠. 그 과정에서 실제 책의 초판본과 세계 지도의 실물을 볼 수 있어서 눈이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빠져나올 때는 벽면 곳곳에 지혜에 관한 명언이 적혀 있었습니다.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좌: 지혜는 좋은 맹우요, 지식은 친밀한 가족이다
중앙: 배워야 할 것은 남김없이 배워라. 배운 뒤에는, 그것에 맞게 살아라
우: 학자다운 것과 왕다운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왕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존경받으나, 학자는 가는 곳마다 존경받는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마음에 스며드는 힘이 있습니다. 철학과를 졸업한 지금, 무엇으로 먹고살지 고민하는 저에게 명쾌한 길을 제시해 주는 글귀입니다.
배운 것에 맞게 살아라!
맞는 말입니다. 제가 철학을 배운 이유는 잘 나가는 사람을 질투하거나, 혹은 남이 제시한 기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 아등바등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쳤던 것들, 사소하게만 보였던 것들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지금의 저는 배움에 맞게 살고 있네요. 스쳐 지나가는 투박한 나날을 문장으로 갈고닦아 둘도 없는 보물로 만든 다음, 당신에게 선보이고 있으니 말이죠. 비단 남에게 보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미래에 제가 지치고 힘들어서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 이 글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지나온 길이 실은 반짝이는 보석길이라고 깨달았으면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 지식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너른 전시회장 안에 알차게 채워 넣은 지식을 소화하려면 오늘 하루를 다 써도 모자랄 것 같네요. 언젠가 당신도 꼭 동양문고에 들러서 지식의 대여정에 참가하길 바라며, 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2024년 쌀쌀한 어느 날, 동양문고 뮤지엄에서
Y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