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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Nov 10. 2024

여행 서점&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서 보내는 편지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꿉꿉했어요. 비가 내리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일기예보 앱에 우산 마크가 죽 늘어서더군요. 그렇지만 아무리 궂은 날씨라도 발걸음을 멈출 새는 없습니다. 되도록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되도록 새로운 장소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으니까요.


 오전에는 날씨가 맑은 틈을 타서 여행 서점 <Nomad Books>에 다녀왔습니다.


파란색 문틀이 인상적인 여행 전문 서점 <Nomad Books>입니다


 내부에는 10평 남짓한 공간에 빽빽하게 책이 들어차 있습니다. <旅の本屋(여행 서점)>이라는 소개 문구에 걸맞게 사방을 둘러싼 책장에는 온통 여행에 관한 책이 가득합니다. 실제로 서점 리뷰를 살펴보니, 주인아저씨도 1년에 한두 번은 가게를 닫고 해외여행을 가서 직접 책을 공수한다고 합니다.


 기대감에 부풀어서 들어서자마자 웬걸, 한국어가 들립니다. 맨 앞에 진열된 북큐레이션 코너에는 <이번 달에는 한국 여행 어떠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번 달 주제는 한국 여행인 모양이에요. 서울, 부산, 제주도 등등 온갖 관광지의 정보는 물론이요, '집에서 만드는 간단한 한국식 집밥!'이라는 요리책도 있습니다. 그걸 보고 은근히 가게 아저씨에게 자랑하듯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모른 척 지나갔습니다. 뿌듯함 반, 쑥스러움 반이었거든요.


 가게 안을 반시계 방향으로 둘러보니 차례대로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 홍콩, 중국 대륙 코너가 있었습니다. 마치 세계 지도를 똑 떼어서 서점 안에 구현해 놓은 듯했습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단순히 관광 혹은 여행 도서뿐만 아니라 주인이 직접 여행지에서 사 온 건조식품이나 도시락, 세계 각국의 전통 요리책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했던 것은 바로 이 책, 『古代メソポタミア飯~ギルガメシュ叙事詩と最古の レシピ(고대 메소포타미아 밥~ 길가메시 서사시와 최고最古의 레시피)』입니다.


이 책을 보고서 '자택에서 직접 고대 메소포타미아 식단을 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왔구나, ' 그런 생각에 젖었습니다.


 '세상에, 이제 저 멀리 있는 아시아인들의 집에서도 바빌론 식단이 차려지겠군.' 그리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미래로 온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이 이걸 보게 된다면 당장 향수에 젖어서 고향의 맛을 느끼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실없는 상상도 듭니다.


 이 허무맹랑한 공상을 조금 더 풀어보고 싶네요.


 제가 만약 불로불사의 존재고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야 된다면, 수백 년 뒤의 세상을 보고 어떤 감상에 빠질까요? 여행 서적이나 사진집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감상에 빠집니다.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기후도, 환경도, 풍경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달라지죠. 제가 알던 풍경 위로 낯선 광경이 덧칠되고, 결국 당연하게만 여겼던 그때 그 시절은 시간의 강과 함께 저 멀리 흘러가서 그리운 풍경이 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억 속에만 남겨진 향수를 좇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 때문일지도 몰라요. 일상을 벗어나 웅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지나간 나날들을 회고하며 영혼이 추억에 잠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일상이 문득 떠오르면 그제야 제 자리로 돌아오죠. 판에 박힌 일상 또한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퇴적물이 되고, 내 영혼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니까요.


 아참, 거기서 뭘 샀는지도 자랑하고 싶어요! 여행 신문 <Papel Soluna(파펠 솔루나)>의 한국 편, 싱가포르 편, 그리고 북유럽 편입니다.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오바타 메이'씨가 독립 출판하고 있는 여행 신문, <파펠 솔루나>입니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로 그려진 한국을 보니, 새삼 머릿속에서 한국의 풍경이 미화됩니다. 오바타 씨는 한국의 음식이 가장 인상 깊었는지 유독 다른 나라에 비해서 한식 그림이 많아서, 읽는 내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끊이질 않았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앞에서 비빔밥과 삼겹살이 아른거려요... 혹시 일본에 오신다면 꼭 한국 음식도 같이 가져와 주세요, 약속입니다! 

 




 그렇게 눈과 입이 즐거운(?) 노마드 여행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향했습니다. 바로 와세다 대학 내에 위치한 무라카미 하루키 기념도서관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기념 도서관의 외관입니다. 여기서 잠깐 퀴즈! 대나무 처마처럼 얼기설기 얽어놓은 저 조형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와세다 대학으로 갈 때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기온이 떨어지더라고요. 다행히 손발이 시릴 즈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풀숲에 파묻힌 간판에 <와세다대학 국제문학관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도서관은 원래 와세다 대학 강의동 4호관이었습니다. 학생 운동이 활발했던 1970년대에 학생들에게 무단으로 점거된 이후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죠. 그곳을 새롭게 리뉴얼해서 개장한 곳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기념도서관입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저를 반긴 것은 무대 장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해변의 카프카』실사 연극에 사용된 토성 무대장치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기념하는 도서관답게 내부 시설에는 그의 작품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요소가 가득했습니다. 1층 카페 라운지에는 그가 1975년 운영했던 재즈바 <피터 캣>에서 실제로 사용된 피아노와 그의 개인 소장용 LP판이 전시된 오디오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들이 초판본으로 늘어서 있고요.


 사진을 찍으려니 도서관 안내원이 "이용객들의 얼굴이 찍히지 않게 찍어주세요"라고 했는데, 그날따라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요. 아쉽지만 이곳 신문 기사에 소개된 사진으로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좌: 무라카미 하루키가 운영한 재즈바에서 실제로 사용된 피아노. 옆의 책장에는 무라카미의 대표작들이 진열됨 / 우: 그가 기증한 LP


 그리고 대망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무라카미 하루키 기념도서관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 바로 이곳입니다. 아치형 계단은 꼭 목재 터널처럼 보이는데 양쪽에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서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많은 방문객들이 여기서 사진을 찍느라고 여념이 없더라고요.


 계단 앞에는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쿠마 켄고(隈研吾) 씨의 코멘트가 남아 있습니다.


 村上さんの小説を読み始めると、僕はトンネルの中に吸い込まれるような感覚を味わう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나는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맛본다.


 그의 감상은 계단을 오르는 내내 여실히 전해졌습니다.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갈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연도별로 전시된 것을 보면서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거대한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그대로 받았거든요. 게다가 그 자신은 날마다 이런 터널 속을 헤매면서 기묘하고도 신기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나가고 있겠죠? 그 사실에 약간 질투가 일어났습니다.


 2층 열람실에 도착한 저는 책장에서『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라는 책을 뽑아 들었습니다.


복슬복슬한 양의 탈을 뒤집어 쓴 저 남자가 주인공인 양 사나이입니다.


 내용은 딱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답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양의 탈을 쓴 '양 인간'들이 등장하고, 갑자기 양 성인聖人의 저주를 풀기 위한 모험이 시작되고, 그에 따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올 법한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워낙에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 때문에 읽는 내내 '저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복장이 터지겠구나'하는 현실적인 감상(?)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불합리함을 납득시키는 마법의 문장도 떠올랐죠.


 '뭐, 무라카미 하루키 답네.'


 저는 책을 읽는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독특한 세계를 듬뿍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러웠죠. 자신의 분신 격인 작품들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고 자신만의 가치를 확고하게 다져나간 그가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질투와 흥미진진함에 사로잡혀서 단숨에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도서관을 나설 때는 후문으로 나갔는데, 그곳도 대나무로 된 조형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후문으로 나서자, 그제야 건물 정면을 두르고 있던 대나무 처마가 사실은 터널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터널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상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터널을 통해 현실로 나왔습니다. 가슴속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상력을 품은 채로 말이죠.


 다만 질투와 부러움은 도서관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 왜냐고요? 이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을 포함한 누군가가 제 글을 읽어주고, 제가 보는 것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공감해 주니까 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있는 그대로 인정받은 겁니다. 


 그러니 부디, 당신에게도 이 편지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터널이 되길 바랍니다.


 날이 쌀쌀해져서 이만 이불 속에 들어가야겠어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 때쯤에는 날씨가 맑아지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럼 다음 편지를 쓸 때까지 건강하세요.


 2024년 쌀쌀한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여행 서점과 무라카미 하루키 기념도서관에서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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