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文藝)’는 문화예술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이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한 선배가 어느 날 건넨 이 말은, 내가 무심코 문화예술이라 써 왔던 단어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문예라는 말은 이제 종종 행정적 용어 속에서 기능적으로 쓰이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인간의 사유와 감성의 결합, 곧 이야기와 아름다움의 공존이다.
우리는 흔히 ‘문예부흥’으로 번역되는 르네상스를 예술의 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예술과 건축의 융성만이 아닌, 중세의 긴 침묵을 넘어서 인간 중심의 사유를 되찾으려는 인문학의 부흥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다시 생각하고, 다시 느끼며,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하려는 인류의 열망이었다. 그 흐름의 근원에는 지혜의 집이자 문예의 거점인 도서관이 있다.
고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이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인류 최초의 도서관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아(Bibliotheca Alexandrina)에는 학문과 예술의 신전인 ‘무세이온(Mouseion)’이라 불리는 공간이 함께 있었다. 예술의 신인 뮤즈(muse)의 거처라는 뜻을 지닌 이 공간은 예술과 학문이 한데 숨 쉬던 장소였다. 도서관은 지식의 창고인 동시에 예술의 무대였고, 기록과 상상이 함께 자라는 토양이었다.
이 도서관을 사랑한 인물로 클레오파트라를 빼놓을 수 없다. 절세의 미모와 정치력으로 널리 알려진 그녀는 로마로부터 수천 권의 필사본을 들여오며 도서관을 세계 최대 규모로 확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서관은 단순한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이집트 고대 문명을 지키는 방패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전쟁과 화재로 수차례 파괴되었지만, 수많은 이들이 책을 지키려 온몸으로 나섰다. 불타는 궁전보다 한 권의 책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했던 시대. 인류는 그렇게 문예를 지켜 왔다.
중세 유럽이 암흑기에 머물던 시절, 이슬람 세계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을 꽃피웠다.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의 모스크 곁에는 언제나 ‘지혜의 집(바이트 알 히크마, Bayt al-Hikma)’이라 불리는 도서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유는 신앙과 함께했고, 예술은 과학과 나란히 걸었다. 도서관은 신성한 예배의 공간이자 창의적 사유의 공간이었다.
도서관은 단지 지식을 모으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넘어, 상상과 창의성의 자유가 허용되는 장소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도서관에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도, 존재의 이유를 묻는 철학도, 미래를 여는 상상력도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을 ‘지식의 바다’라 부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바다를 항해하며, 마음속의 등대를 하나씩 밝히는 일이다. 마침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인근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던 파로스 등대가 있었다. 도서관과 등대, 지식과 빛은 그렇게 오래전부터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도서관이 최근에는 시민의 문해력 향상을 위해 더욱 의미 있게 진화하고 있다. 얼마전 부산에서 시작된 ‘책의 바다, 바다도서관(Bibliotheca Busan)’이 눈에 띈다. 해변에서 펼쳐지는 바다 도서관은 도서관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 ‘책과 바다’, ‘인간과 자연’, ‘예술과 공동체’를 하나로 이어 준다. 시민들은 해변에서 책을 읽고,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강연을 듣고, 공연과 전시를 즐기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책이 예술과 만나고, 도서관이 살아 있는 인문학의 광장이 되는 그 찰나와 마주선다.
특히 바다도서관은 단순한 독서 행사를 넘어, ‘책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 머무는 도서관, 도서관이 숨 쉬는 예술 무대. 그것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계승이다.
바다는 모든 강이 모이는 곳이고, 도서관은 모든 지식이 모이는 장소다. 문예(文藝)는 바로 이 도서관에서 길을 찾고, 또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간다. 도서관은 단지 과거의 문서를 모아 놓은 아카이브가 아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지식이 흐르는 살아 있는 강이며,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인류의 기억창고이다.
부산의 바다도서관은 그 속에서 사유하고 숨 쉬며,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있으며, 어떤 길을 밝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