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돌 Mar 15. 2021

공무원 첫 출근은 어땠나요?

너희가 공무원을 아느냐



수험공부 3년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J 씨. 이달 말 세종 정부청사로 발령을 받고 첫 출근을 앞두고 있다. 한편으로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문득 과거 선배들의 첫 출근 했을 때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과거와 현재의 공직분위기를 조명해 보자.




내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학생의 신분이었고 아직 공무원 7급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독서실에서 이감생활을 하면서 야간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9급 공무원은 수험생활 7개월만에 합격햇다. 어머니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그 소식은 동네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지금의 반월은 수도권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누구 아재나 누구 할배 하면 통할 정도의 집성촌이었고 문중이 실핏줄처럼 잇대어 있었다.   

   

공무원 시험 합격한 날, 나는 사실 합격이라는 기쁨의 음계를 밟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친구들과 서울의 신림동 허름한 순대골목에서 소주잔을 어깨 걸고 있었다.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도취감보다도 어쩌면 열정적으로 준비했던 7급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소주에 용해시켰다.      


지금의 행정안전부 전신인 총무처 주관 7급 시험은 1년에 한 번 시험이 있었는데 이미 그때 나는 보기 좋게 7급 시험에 낙방이라는 고배를 마셨고 내년 시험을 기약하는 처량한 신세였다. 더욱이 영락해가는 우리 집 가정 형편으로는 내년까지 수험생활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 나를 비감에 젖게 했다.      


9급 공무원은 국가직과 경기도 지방직 시험에 동시 합격을 했을 때 인사명령이 난 것은 국가직이었다. 나는 출근하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경기도는 어디에 인사발령이 날지 몰랐다. 예를 들어 같은 경기도지만 반월에서 남양주나, 철원같은 경우는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에서 세 기간이 걸리기 까지 했다. 


나는 어느 지역에 인사발령 날지 모르는 지방직보다는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 말처럼 서울에 근무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공직의 분위기를 타진할 겸 출근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았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싶으면 바로 퇴사해서 7급 시험 준비를 하겠다는 얄팍한 요량의 심산도 깔려 있었다. 


첫 출근하면서 사실 설레임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덤덤했다. 특별히 준비물도 챙기지를 않았다. 간단한 필기도구 정도가 전부였다. 기분도 담담할 뿐 긴장이 되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 그날 나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새벽에 첫 출근을 했다. 


대기는 무거웠고 용산에서 내려서 직장 정문을 통과하자 강성한 나무들이 위용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너른 잔디 운동장에는 아직 11월의 푸르른 잔운이 남아 있어서 흡사 내가 공원에 와있는 것처럼 착시현상이 들기까지 했다.      


인사부서에 도착한 시간은 7시 50분이었다. 출입문은 문틀에 경첩을 축으로 한 여닫이문이었다. 자물쇠로 채워진 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바깥에 들리는 아침의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이 적요를 깨고 있었다.      


8시 40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 찾아왔나 하는 걱정이 앞질러 갔다. 9시가 공무원 출근시간인데 9시가 넘어서도 복도에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일순 무언가 잘못되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분침이 9시 30분을 기다렸을 때는 다리마저 뭉근하게 아파왔다. 복도에서 1시간 40분을 엉거주춤 선 채로 기다렸으니 다리가 뭉근하게 당겨오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일찍 오셨네요.’ 하면서 자물쇠를 열어 문을 따는 직원이 있었다. 알고 보니까 내가 첫 출근한 날인 1993년 11월 16일 수능시험 보는 날이었다. 그 당시 국가기관도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늦춰져 있었다.      


첫날은 임용장을 받았고 부서마다 인사하러 다녔다. 사무실 인사할 때마다 영비천 같은 드링크제를 하나씩 주었다. 성의를 마다할 수 없어서 처음에는 주는 대로 받아 마셨는데, 나중에는 배가 불러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음료수 마시는 것이 곤욕이었다. 결국 반만 마시거나 드링크 병을 따지도 않고 테이블에 놓고 나오고는 했다.      


그다음 날 출근해서 사무실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 인원은 16명이었다. 첫 출근해서 살핀 사무실 분위기는 실망 자체였다. 첫 번째는 사무실 직원 평균 나이가 오십을 넘는 전부 꼰대들이었고 내 위 선배는 나보다 열세 살이나 더 많았다.        


두 번째는 사무실에서 선배들의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모습이었는데 숫제 너구리 잡을 기세였다. 비흡연자인 나에게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세 번째는 사무실에 흑백 286 피시가 두 대가 있었는데 워드 치는 모습이 가관이 아니었다. 한쪽 다리를 괘 얹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하나워드(과거 한글 프로그램)를 치는 모습은 나태의 표본으로 보였다.      


내 보직은 행정이었다. 말이 행정이지 과 심부름꾼의 변형된 양상이었다. 아침마다 인사과 들러서 들고 온 문서를 접수대장에 등재하고 담당자에게 나눠주었다. 담당자가 문서를 생산하면 등록대장에 기록하고 발송해 주었다.      


직원들은 나이 어린 내게 복사 심부름을 거리낌 없이 시켰고 본인이 칠 수 있는 워드 작업도 나를 시켰다. 나는 그때마다 업무를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보다 빨리 후임이 들어와 무보직에서 탈출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보직도 없는 경직된 직장에서 진득이 배겨 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다른 기관에 없는 국방부 특유의 복지가 아니었나 싶다. 일단 직장은 전셋집과 신혼집을 해결해 주었다.   

   

들어가자마자 새마을금고에서 전세 대출을 받을 수 있어서 서울에서 전셋집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또, 국방부는 결혼과 동시에 서울 중심부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거의 무상으로 5년간 살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고가의 가전제품을 면세로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당시 커다란 경제적 수혜였다.    

  

또 직장에 제법 규모있는 도서관이 있다는 것도 나를 신명 나게 했다. 도서관 안에는 어느 시립 도서관 못지않게 다양한 장르의 도서를 배치하고 있었고 독서실 책상까지 놓여 있어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근무시간에도 틈틈이 짬을 내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직장에서 어쩌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잔잔한 생각이 감돌았다. 의원면직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세월이 켜켜하게 더께앉아 어느덧 머리가 희끗한 내 나이 오십, 지천명을 지나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