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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Jul 05. 2023

 장편소설 '행복배틀', 허황된 망상의 서스펜스 스릴러

주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1. 들어가면서 


요즘 주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행복배틀'이 드라마로 방송되면서 시선을 끌고 있다. 드라마는 중반을 향해 치닫고 있지만 나는 시청하지 못했다. 내가 가입한 넷플렉스에서는 아쉽게도 공개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하여 티빙에 가입하는 것도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주영하 작가는 다산북스 판타지 공모전에서 '시간의 계단'으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추미스 소설 공모전에서 '콩가루 수사단'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특히 '행복배틀'은 제1회 케이스릴러 공모전 당선작으로서 이미 작품성을 검증 받았다. 


이 소설은 최상위 부모들의 허황된 망상이 파멸로 타락하는 과정을 밀도 깊게 풀어내고 있다. 행복을 겨루는 최상위 계층의 엄마들 중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감추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의 고단한 싸움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다. 


얼마 전 읽은 김진영 작가의 '마당이 있는 집'도 공교롭게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이었는데 이번에 고른 행복배틀 역시 동일한 유형의 책이었다. 사실 두 소설을 읽으면서 꼭 잔인하게 몇 명씩이나 죽어나가는 살인을 등장시켜야 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주영하 작가와 김진영 작가 두 분다 소설 등단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두 분다 공모전 입상을 통해 데뷔했다. 과거에도 등단하지 않고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친 작가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훈, 김진명, 성석제 작가 분들이다. 그들은 문단에 한 획을 그었다. 



2. 전체 줄거리(스포주의)


유난히도 달 밝은 밤, 오유진이 한 아파트 난간에 배를 걸친 채 상체를 바깥으로 내밀고 있었다. 까치발로 선 그 여자는 난간에 배를 걸치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살시도로 보였다. 목격자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여자는 죽어 있었다. 


'이걸 우수상으로 뽑자고?' 장미호 과장은 김대리가 내민 사진 한 장에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유진이 공모한 사진 속 배경은 고급스러운 아파트 거실이었다. 부모에게 양팔을 벌려 달려가는 딸아이들의 모습은 행복하고 부유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미호는 응모자 사진을 보는 순간 17년 전 그 누구의 앳된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오유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게 된 이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오래전 절연한 친구를 보게 될 줄 몰랐기에 미호의 심경은 복잡했다. 


'장미호 과장님, 우수상 오유진 씨 전화 연결이 안 돼요.' 전화와 문자, 메일, SNS 쪽지도 확인이 안 되고 있었다. 나중에 친구 세경을 통해 확인한 사항은 오유진이 응모한 사진은 '반포동 부부 피살사건'의 희생자 가족이었다. 


꿈 많던 열일곱 살, 미호는 도서관에서 친구 세경의 자리를 맡아 놓고 있었다. 유진이 그 자리에 앉았다. 미호는 이상하게 유진이한테 끌려 앉아도 된다고 했다. 세경, 유진 세 사람이 친구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격과 외모가 판이하게 다름에도 그들은 절친이 되었다. 


그 무렵 미호는 독서실에서 남자아이를 처음 만났다. 박혜성, 피부가 하얗고 선이 고운 남자였다. 혜성이 좋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미호는 좋았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으슥한 골목에서 입 맞춤하는 것도.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셋은 술집 골목길에서 마주쳤다. 미호와 혜성이 영화 관람 후 몰래 데이트를 즐기다가 유진과 세경이 있는 번화가 뒷골목에서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세경이 술집을 들어가다가 알바를 하고 있는 유진을 만나 잠간 바깥에 나온 찰나였다. 


모범생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서로의 민낯을 마주했다. 셋은 동네 놀이터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의 지나친 억압 속에 미호는 혜성과의 일탈이 즐겁다고 했다. 유진은 대학 입학 후 바로 독립할 예정인데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경은 가람단 선배들에게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출동한 경찰들은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배를 걸치고 있던 오유진을 발견했다. 오유진은 과다출혈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방안에서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엎드려 쓰러진 남편 강도진을 발견했다. 집안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오유진은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정사진이 아니라 광고 표지 속 인물 같았다. 미호와 세경은 상주와 맞절을 했다. 유진의 남편은 치과의사였다. 국내 최고가라는 반포동 하이프레스티지에 살고 있었다. 일곱 살, 다섯 살, 딸 둘에 임신 중이었다. 


미호는 이 비극이 남편이 아닌, 유진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두 명의 여자가 굳은 얼굴로 장례식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아와 나영이었다. 앉은 여자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하는 것 같았다. 


장례식장을 나와 미호는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휘뿌연 안개에 휘싸인 부스는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흡연부스 안에는 서로간의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미호가 담배 한 개비를 붙이려는 참이었다. 


정아와 나영이 장례식장에 나왔다. 두 사람은 한 발짝 떨어진 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마디 말이 없었다. 나영은 인사조차 않고 차에 올라탔다. 그동안 정아는 고집스럽게 정면만 응시했다. 미호가 인사를 건네며 다가갔다. 


'저희 유진이 장례식장 안에서 뵀죠? 전 유진하고 제일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 장미호라고 해요. 여쭤볼게...' 정아는 미호가 말을 건 이유보다 미호라는 사람에 관해 관심을 드러냈다. 그녀의 표정에 의아함이 짙어졌다.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미호는 시민기자라고 거짓말을 했다. 정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치였다. 짐짓 당황하면서도 미호는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을 멈출 수 없었다. 미호는 고등학교 동창인 이유로 유진이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일상, 감정, 인간관계에 관한 기록의 총체. SNS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미호는 SNS 어플에 접속했다. 오유진 팔로워는 3만 명, 게시글은 2천여 건에 달했다. 


'오늘은 부부의 날. 애들 다 친정 보내고 뜨거운 밤을 보낼 예정이에요. 무슨 이상한 생각 하세요? 우리 그냥 영화 볼 건데. 에이. 왜 못 믿고 그러세요?' 유진의 SNS는 행복한 일상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사진들마다 '좋아요'는 하트가 몇 백 개가 넘었고, 그 아래로 부러움에 찬 댓글들이 줄지어 있었다.  


댓글들을 휙휙 넘겨 보다가 문득 어떤 댓글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지런한 언어들 속 모나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주 꼴값을 떨고 있어요.' 이것만이라면 누군가의 시기, 질투라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댓글들은 더더욱 기묘해져 갔다.


미호는 악플을 단 SNS에 접근했다. 살이 많이 빠졌지만 악플러의 얼굴을 즉시 알아봤다. 나영이라 불리던 여자였다. 미호는 오유진의 게시글을 계속 훑어 내려갔다. '너 없었으면 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 세상 제일 든든한 아군, 내 전부를 아는 그녀. 언제나 사랑하는 거 알지?' 


한동안 산책로를 따라 걷던 미호는 아파트 단지 내 위치한 유치원으로 향했다. 금세 놀이터는 엄마들과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때 자전거를 끌고 터덜터덜 유치원으로 향하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나영이었다. 


미호가 유진이하고 같은 유치원 다니는 어머니가 맞냐고 물었다. 나영은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진 샛길로 시선을 던졌다. 미호는 얼마 전에 유진이 SNS 사진을 봤다고 했다. 나영의 음성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쓰레기 같은 년. 똥통에 머리 처박고 뒈질 년. 배를 가르면 더러운 진물밖에 안 나올 년이. 추악해. 더러워. 속이 다 시원하다. 죽어도 싼 년' 나영의 거친 호흡에 내뱉어진 마지막 말에, 미호는 이제껏 그녀가 누구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는지가 밝혀졌다. 


'서로 제대로 맥이네' 세 사람의 SNS를 살려보던 미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유진이 딸들에게 순둥이가 따로 없다고 게시글을 올리면 나영은 '쪼끄만 게 어찌나 표독스럽게 울어대던지, 유진 씨 참 고생 많구나 싶었어' 심지어 둘째 딸이 하나도 안 닮았다며 유전자 검사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는 댓글을 달았다. 


미호는 유진의 SNS에서 나영의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세 장이었다. 아래로 날카롭고 단호한 댓글이 적혀 있었다. '바라보는 눈길에 사랑스러움이 가득함.' 사진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세 사진에 모두 조아라 담임선생이 등장했다. 유치원에는 나영의 남편과 조아라 선생이 뷸륜의 관계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유진은 담임 선생님의 사진을 게시해 나영을 교묘하게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17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미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엄마였다. 미호의 엄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었다. 1등 자리를 놓쳤을 때 사정없이 날아드는 회초리. 통금 시간을 어겼을 때 쏟아지는 비난과 폭언. 


그래서였을까. 혜성과의 일탈은 즐거웠다. 혜성과 첫 관계를 가진 순간부터 미호 내면의 기준점은 붕괴되고 말았다. 미호는 멀찍이 떨어진 변두리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산 다음 검은 봉지에 몇 번이나 말았다. 수련회에서 몰래 테스트를 하고 화장실에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이상하다. 내 가방이 아닌가' 수련회에서 술에 취한 유진이 미호의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임신테스트기를 본 것 같았다. 미호는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미호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술기운 때문일 것이다. 혹은 낯선 장소, 특수한 상황이 주는 고양감 때문일지도. 판단력이 흐려졌다. 미호가 임신테스기를 가져왔다고 세경과 유진에게 말을 했다. 일주일 전 혜성과 첫 관계를 가졌다는 것부터 임신이 걱정된다는 이야기까지. 


'넌 남자랑 자본 적 없잖아' 미호의 말에 세경은 '나도 구정물 튄 인생을 증명할 수 있어. 기억나? 내가 얼마 전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떤 남자랑 여자가 차 안에서 떡 치는 걸 봤다고 말한 것. 그거 사실 우리 아빠야.'  


'유진이 넌?" 구정물 튄 인생을 증명하라고 장난스레 화제를 유진에게로 돌렸다. 갑자기 지목당한 유진은 당황하더니 곤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솔직히 얘기할 거리가 없는데...'


사건이 발생한 지 수 일이 지났다. '반포동 프리미엄 맘까페' 가입조건은 까다롭다 못해 살벌했다. 남편의 재직증명서, 재산세 납부증명서, 기존회원의 추천까지 필요했다. 가입하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이 넘쳐났다.


오유진, 송정아, 김나영 모두 그 프리미엄맘까페의 성실회원이었다. 세경은 캡처한 정아의 SNS를 내밀었다. '결혼 10주년 선물이라나 뭐라나. 이런 거 필요 없는데. 하여간 고마워 남편.' 정아는 목걸이 다이아 부분을 손으로 잡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아의 게시글에 달린 댓글에 시선이 갔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많이 무리하는 거 같은데.' 유진이었다. 다른 사진에도 댓글이 이어졌다. '진짜 무리하는 거 같은데. 이제 형편 좀 생각해야 하지 않아?'

 

그때였다.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판도라의 상자. 블랙리스트였다. 정아의 남편은 부도의 위기에 몰렸다. 맘까페에서 이 사실을 알면 투자금을 회수할 것이 불을 보듯 했다. 정아는 사주지도 않은 다이아를 게시하면서 남편의 사업이 건재하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진이 두 달 전쯤. 어떻게 귀신같이 냄새를 맡았는지 등기부등본을 떼보았다. 정아네는 사업이 어려워지자 사는 집을 매매하고 월세로 돌린 것을 알았다. 유진이 이 사실을 알고 댓글로 교묘하게 정아를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수련회.  비밀이 털어놓은 세경이 장난스럽게 유진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유진이는 할 얘깃거리가 없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나도 할 말이 있어'하면서 털어놓았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깨를 감쌀 때는 미묘하게 손가락이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고, 허리를 살짝 끌 때는 엉덩이 윗부분에 손길이 스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성적학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교회 목사인 새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잠들었던 것일까.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이 얼굴을 덮쳤다. 미호의 엄마였다. 손에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있었다. 미호는 쏟아지는 폭력 세례에 두려움이 목울대를 넘어왔다. 아니야 내 거 아니야. 미호의 코에서는 붉은 선혈이 떨어져 바닥에 질펀했다. 


미호는 임신테스트기가 유진이 거라고, 유진이가 성폭행당했다고, 계속된 엄마의 추궁에 상대는 선배 아니면 선생님일 거라고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미호는 순진했다. 엄마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얼마뒤 엄마가 진로 상담 명목으로 학교에 왔고 그 후에 유진이 학교선생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은 눈사람처럼 커져만 갔다. 유진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찬 바람이 불던 그해 11월, 서라고등학교 5층에서 성폭행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주현 선생이 자살했다. 과학실에 유서 한 장 달랑 남겨놓은 채.


그러다 17년 만에 발견한 유진의 가족사진. 17년 전  그 일이 아무런 결점을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미호는 유진의 죽음에 집착했다. 유진의 죽음이 그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한주현이 죽은 뒤 세경은 새빨개진 얼굴로 악을 썼다. '걔 때문에 죽었어. 한주현이 죽었다고. 뛰어내렸대. 학교에서 미친년. 그 미친년 때문에. 원망하고 분노할 대상이 필요했던 세경은 모든 걸 유진의 탓으로 돌렸다. 


한주현 선생을 사모했던 세경은 악다구니를 쓰며 통곡했다. 탈진으로 혼절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진을 향해 이런 말도 쏟아냈다. '너도 죽어, 너도 죽어버리라고?' 그런데 정말 유진이가 죽었을 때 세경은 어떤 마음일까.  


경찰은 유진이 칼로 자해한 다음 도준을 찌른 것이라 사건 전말을 공표했다. 미호는 원인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다. 유진의 죽음. 미호는 그 진실을 대면하며 속죄하길 원했다. 그녀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엄마는 꿰뚫을 듯 미호를 직시했다. '알고 있었지? 유진이 성추행한 사람이 새아빠라는 거.' 미호의 엄마는 모른다며 어디서 지 어미를 거짓말하는 년으로 모나냐며 그딴 추잡한 일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미호가 다그치자 엄마는 독한 년이라며 미호 말이 맞다며 교회에서 유진이 새아빠가 유진이 엉덩이 만지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분노와 긴장감이 폭발할 기세로 치솟았다. 


'그러면 왜 학교에는 유진일 성추행한 사람이 한주현 선생이라고 얘기한 거야?' 엄마는 내 딸자식만 지키면 되는 거라고 하면서 말을 이었다. '넌 그때 유독 그 선생님하고 어울려 다녔어. 그리고 네 가방에서 임신테스트기 나왔고. 그런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해.' 


그 무렵 미호는 혜성과의 만남을 위해 엄마한테 무던히도 수학연구반 핑계를 댔었다.그래야 엄마가 흔쾌히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미호를 보호하기 위해 유진이가 성폭행당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미호는 심장이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는 것 같았다. 미호는 17년 전 유진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미호야. 우리 얘기 좀 할래? 나 너무 무서워서 그래. 너마저 나한테 이러지 마. 나 너네 집 앞이야. 잠깐만 나오면 안 돼? 기다릴게'


미호는 비명을 지르며 난초 화분을 휘둘러 엄마의 머리를 내리쳤다. 엄마는 악, 비병을 지르며 소파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이마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당신은 괴물이야' 미호는 하얀 니트를 축축한 피로 물들이는 엄마를 내버려 둔 채 돌아섰다. 


미호는 단서인 USB를 찾기 위해 유진의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른 감정과 생각은 거세된 듯 오로지 그 목적하나만이 강렬하게 마음을 지배했다. 유진의 집.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미호는 USB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때였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침입자가 있었다. 오금이 저렸다. 전신이 굳어 있었다. 침임자는 유진의 남편 도준이었다. 몸이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찾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혹시 USB. 그 역시도 그걸 찾고 있는 걸지도. 


그때였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드디어 알았다. 유진이 왜 그토록 기묘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USB는 702호 베란다 아래 있는 화단에 있었다. 그날 유진은 남편이 소아성애자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딸이 그린 USB 그림을 잘게 찢어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그러고는 USB를 화단에 버리기 위해서 베란다로 향했던 것이다. 


도준은 USB를 화단에서 찾아냈다. 도준은 고개를 들어 휙휙 주위를 살피고는 USB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미호는 속이 타들어갔다. 미호는 핸드백에서 돌덩이를 꺼냈다. 도준의 머리를 내리쳤다. 도준을 승용차 뒷좌석에 싣고 묶었다. 운전석에 올라타서 떨리는 손으로 USB를 꽂았다. 


전부 여자아이들로 추정되는 이름의 폴더가 수두룩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저 공연행사 때 찍은 영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2년 전, 유진이 딸 지율은 뱀이 무섭다며 공연행사 도중 숨어버리는 소동이 있었다. 유진의 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에게 몹쓸 짓 당한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유진이 진짜 두려워했던 것은 뱀이 아니었다. 뱀이 상징하는 아빠의 '무엇'이었다. 남편 몰래 숨겨둔 USB 속 영상을 보고 유진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소아성애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유진은 남편이 소아성애자에 아동성추행범이라는 사실보다 자신의 행복에 오점이 생겼다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유진은 퇴근한 도준과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USB와 스케치북을 코앞에 들이대며 사실을 추궁했다. 도준이 끝내 부정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부엌칼을 갖고 오지 않았을까. 그러다 끝내 유진은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입고, 도준은 등에 일격을 당한 채 방안에 쓰러졌다. 


'누구야, 너' 한참만에 뒷좌석에 묶인 도준이 깨어나 입을 열었다. 제발 살려달라고도 했고, 억울하다고도 했다. '내 친 딸을...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요?' 미호가 여자애들 동영상을 다 봤다고 이야기하자 도준은 다른 아이 엄마한테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도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런데 감자기 애들 엄마가 USB를 들이밀면서 이거 뭐냐고... 이런 거 보면서 자위하고 그랬냐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듣질 않았어요. 그러더니 우리 딸한테까지 손댔냐면서.


도준은 2년 전 가족이 캠핑장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딸이 뱀을 봤다고 뱀이 자기를 쫓아온다고 하면서 울었다고 했다. 미호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미호의 머릿속은 이딴 진실을 알기 위해 도준을 납치한 게 아니다. 이딴 게 진실일 리 없었다고 생각했다. 


둘은 차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차는 멈추다 뒤로 굴러가다가를 반복했다. 그때 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안의 생살을 씹었다. 난간에 걸린 차는 작은 움직임만으로 흔들거렸다. 둘은 간신히 차 안에서 빠져나왔다. 


응급실에서 처음 눈을 뜨자마자 미호는 유진이 딸의 음성메시지를 확인했다. 딸은 떠듬떠듬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늘어놓았다. 


- 아빤, 우리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도준은 마침내 살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미호에게 납치당한 사실은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그는 이 끔찍한 비극의 진실에 대해 영구히 함구하길 원했다. 



3. 감상평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몰입감과 흡입력이 좋다는 것이다. 한번 읽게 되면 서스펜스적 스릴감에 책장을 끝까지 넘기게 된다. 게다가 작가의 농도 깊은 필체는 리얼한 묘사를 끝까지 유지하고, 또 그 긴장감이 손에 땀을 쥐게 그려진다. 


또한 소설의 모티브도 참신하다. 동명이인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서 17년 전 죽은 유진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새로운 유진에게 투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존하는 최상위 계층의 욕망과 허무를 제대로 파헤쳤다.


단점으로는 지나친 반전과 반전은 극적 긴장감을 상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후의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필력도 좋고 몰입감도 좋은데 왜 읽고 나면 허무함이 사위를 감싸는 것일까. 


유진이 아무리 고등학교 때 새아빠한테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남편을 소아성애자로 몰고 부엌칼로 찌를 수 있을까. 아무리 소설이 픽션이지만 어떻게 아빠가 정신이상착란자가 아니고서야 자기 딸을 생각하며 자위를 할까. 


상식의 틀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불편한 감정을 끝내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빤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안 했어요'하는 딸의 진실이었다. 


연못에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으면 죽는다. 안타까운 것은 어른들 싸움에 피터지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유진을 죽인 것은 세경이 이기도 했지만 방관한 미호이기도 했다. 둘은 17년간 철저하게 유진의 죽음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살아왔다. 


어느 독자는 지나친 나쁨의 전개라며 리뷰를 먼저 봤다면 앍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 현실성과 유리된 결말의 허무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래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나름대로의 독자들에게 반향이나 울림을 주었다면 성공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공모전 당선작이기도 하고 드라마로 방송된다는 것은 시청자를 매료시킬 극적 장치가 충분하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4. 밑줄 친 부분


또다시 지분거리는 손길을 쳐냈다

장례식장은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맺은 모든 관계의 집합소다. 

온갖 휘황찬란한 수식어를 붙였지만 내용은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었다

내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일일 것이다

치안 문제로 지역 주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만큼 심각성이 큰 사건...

삶의 이면은 죽음이라는, 잊고 있던 근원적인 공포를 환기시킨다는 점

미호는 눈을 홉떴다

추궁한 것도 없건만 이상하게 돌아온 대답에는 머쓱함이 일었다. 

나영은 오른쪽으로 굽어 사라진 샛길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뻔하고 성의 없는 대답

속에서는 응집되고 단단하게 굳은 감정들이 일시에 폭발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불편한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말투가 호방하고 시원시원했다.

일순 지예의 표정에 짜증이 스쳤다.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는 순간, 그 프레임이 활성화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예는 의뭉스런 말투로 말하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테이블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밀도 높은 공기 속에 톡톡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던 엄마들이 가십거리 대하듯 할 때와 비슷한 태도였다.

점점 팽팽해지던 긴장의 끈이 탕, 하고 끊어지게 된 어떤 일이

행복배틀이 벌어졌던 전장이었으니까요.

직장인들이 한바탕 몰려왔다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한낮의 나른함만이 감돌았다. 

지예와의 만남을 곱씹어볼 시간이 필요했다. 

불안정한 심리와 응어리진 증오에 불을 붙이는 일이 발생했다면. 

문득 이질적인 가족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단아하고 깨끗한 인상, 차분하고 이지적인 성품 뒤에 교활하고 음험한 면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잇는 자들을 악의 편에 세운다. 그들이 정의를 짓밟고 돈과 권력을 휘두른다 생각한다. 하지만 남자는 이 모든 것들이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피가 머리끝까지 역류하는 기분,

밤이라는 시간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생경하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게 한다. 

빨랫대 등 창고 용도로 쓰는 방은 온통 짐 더미뿐이었다. 

그제야 긴장감으로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그리고 침대 방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찢어질 듯한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날밤을 꼬박 새웠다. 

미호는 손잡이를 놓고 문가에 귀를 세웠다.

나영이 또 한차례 웅얼거렸다. 

둥근 안경이 그나마 날카로운 인상을 완화해주고 있었다.

미호는 곁눈질로 병실 내부를 살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뱃속에 똬리를 튼 의문은 점점 부피를 키워갔다.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에서 진원지를 단번에 파악하긴 힘들었다

당황한 미호가 주춤하는 사이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찌르듯 쏟아졌다. 

미호역시 날을 세워 그를 노려봤다. 

머릿속 생각이 어그러졌다. 

손아귀에 힘을 주던 태호는 위협적으로 눈을 치켜떴지만

잰걸음을 치는 미호를 허겁지겁 쫓아왔다. 

벼락같은 음성이 주차장 안에 왕왕 메아리쳤다. 

그녀는 이해나 관용, 양보나 타협이라는 말은 아예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나지막이 울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가을밤의 정취를 더했다. 

혹은 낯선 장소, 특수한 상황이 주는 고양감 때문일지도,

비에 흠씬 젖어 있는 얼굴이 밀랍인형의 그것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미호는 세경을 채근하지 않았다.

자, 떠올려보세요. 행복의 순간과 고통의 순간, 어떻습니까? 행복은 아주 추상적인데 반해 고통은 매우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고통을 통해 실존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어두운 밤도 아니건만 괜스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물이 담긴 컵에 아주 작은 잉크 방울을 떨어뜨린 적은 잇죠? 의심이란 그런 거거든요. 정아가 덧붙인 뒷말이 연기처럼 흩날렸다. 

방긋방긋 미소만 짓고 있던 조아라의 얼굴에 실금이 가 있었다. 

그러나 가슴 가장 밑바닥에 들끓는 감정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바지춤을 한 번 슥 만져.

술기운에 고취된 감정마저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다.

침대에 널브러져 잠에 빠졌다. 

가방은 방구석에 처박아놓은 채였다. 

소문은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해일처럼 몰려온 죄책감이 목을 죄었다.

유진의 죽음이 그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비극의 단초가 될 만한 일들을 막고 싶었다. 

눈시울을 붉혔다. 

목덜미에 자잘하게 소름이 돋아났다. 

당시 세경은 그 사실을 한낱 해프닝처럼, 가십(잡담, 남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거리처럼 얘기했다. 

후덥지근한 여름인데 가슴에  숭숭 찬바람이 드는 것 같았다. 

동화 속에는 인간 감정의 원형이 들어 있대.

저 혼자 독서실로 종종걸음을 쳤다. 

가슴이 선득해지고 전신이 차갑게 식어갔다. 

섣불리 예단하긴 이르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목을 죄어오는 듯한 갑갑증이 일었다. 

그녀는 집요한 사냥꾼처럼 약점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래 학습된 기억은 자동반사적인 반응을 낳았다.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꼭두각시 같던 딸.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던 마리오네트(인형의 마디를 실로 묶어 사람이 조종하는 인형극).

표독스럽게 미호를 쏘아봤다. 예전 수법이 통하지 않자 당황한 눈치였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짓무르고 곪아터진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왔다. 

감정이 극한으로 치닫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감감마저 또렷해졌다. 

그냥 엉덩일 만진 게 아니었어. 슬쩍 지분거리더라고. 얼마나 추잡하고 징그러웠는지. 멀쩡한 내 눈이 썩는 줄 알았지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새까만 절망이 아득하게 덮쳐왔다. 분노가 정수리까지 솟구쳐 올랐다. 심장이 화염에 휩싸여 아오는 것 같았다. 

허탈하면서 자괴감이 깃든 표정이었다.

살인자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부터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내 거짓말이 너를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널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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