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입 밖으로 ‘미안해’ 소리를 내는 게 싫었다.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라는 엄마의 말 때문이다.
‘동생은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 다 큰 네가 먼저 좋게 좋게 끝내렴.’이라는 내용이
양보라는 숭고한 것으로 포장된 것 같았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누구와 싸워도 결국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상대방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안해’라는 말은 더 꼭꼭 입 속으로 숨어버렸다.
어른 입문기였던 이십 대 초반에 연애할 때도 그랬다.
싸움의 끝은 항상 남자친구의 연락이나 방문으로 녹아내렸다.
그중 눈썹이 진했던 남자친구의 한마디가
‘미안해’를 입 밖으로 내보냈다.
그가 한 말은 간단했다.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을 안 하냐.”
나는 이 말에 “냐? 말 끝에 냐? 미친 거 아냐.”
라며 화를 냈다.
(나도 맺음말을 ‘냐’라고 하면서)
이 말꽁무니과 불씨가 돼 유치하게 싸운 후
또 남자친구의 화해 신청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와 얼마간 더 만나다가
영영 진짜 미안할 일 없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헤어진 후 한동안 이 말이 곱씹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미안하냐는 말을 한 번을 안 하냐.’
되풀이할수록 얼굴의 온도가 높아졌다.
한낱 구질구질한 자존심 때문에 ‘미안해’라는
말을 감쳐둔 게 창피했다.
그래서 바로 미안하다는 말을 연습했다.
길 가다가 누군가에게 발을 밟히고 부딪혀도
먼저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무슨 말을 시작할 때 ‘미안하지만’이 자주 따라 나오기도 했다.
하도 이 말을 자주 하니까
점심시간에 메뉴를 고를 때
“미안하지만, 나는 제육볶음 먹을게.”라는 이상한 문장도 만들었다.
각자 먹고 알아서 계산하면 되는 식사 시간에
하다 하다 제육볶음 시키는 것도 미안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입만 열면 ‘미안해’ 자동 재생이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유연해지고 겸손함이 저절로 따라왔다.
미안해 한 마디는 누가 지고 이기는 문제가 아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듯 그냥 하면 된다.
더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다.
‘미안해’의 고상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