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에 바싹 닿아있던 스물아홉,
여태 느껴왔던 여러 감정이 싱거워졌다.
세상살이라는 상차림에서 도무지 아무 맛도 안 났다.
고작 사회생활 3년, 몇 번의 꽤 절절했던 연애,
단호한 인간관계 정리를 통해
굉장한 어른이 됐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능청스러운 핑계인지 모르겠다.
설익은 경험 몇 개 어지러이 쌓아놓고 어른이라니.
마흔의 경계에 서 있는 지금은 그 시절의 엉성함이 앙큼하다.
사실, 여전히 새로운 연령대를 받아들이는 게 두렵다.
끝자리 수가 꽉 차 앞자리 수에 반올림이
되기 직전의 1년은 특히 그렇다.
나잇값 때문일 테다.
간단하게 여러 가지를 구분하는 숫자가
나이와 버무려지면 괜한 무게가 더해진다.
살아온 햇수가 늘어날수록 과정보다 말끔한 결과가
더 중요해지므로.
참 부담스러운 묵직함이다.
그래도 스물아홉 살보다 나아진 게 있다.
이십 대 끄트머리에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도 낭떠러지 앞에 있긴 하다.
그러나 발밑에 미지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앞자리가 바뀐다는 것은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치는 게 아니다.
한껏 헤엄칠 바다에 첨벙 빠지는 거다.
나는 기꺼이 물고기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