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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Apr 29. 2024

나를 돌보는 걷기 생활

걸으면 보이는 것들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화가 차오르고 심난해지면 무작정 나가서 걷기 시작했다. 큰 아이의 중2병이 도지던 그 어느날 쯤이었을지..엄마라는 일도, 딸이라는 일도, 교사라는 일도 모두 다 힘들기만 해서 스스로가 너무 싫다고 느꼈던 그 어느 밤이었던지.. 

시작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걷다가 보면 차오르던 화가 가라앉았다. 거칠던 호흡이 완만해지고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시간들을 잘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산책'이라는 단어에는 다정한 느낌이 가득하여 "산책하러 가자"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산책'이라는 말에는 너무도 다양한 느낌들이 들어 있어 가장 좋은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1.싱그러운 아침에 아무도 없는 공원에 나가는 산책(물론 그 어느 시간에 나가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이길 순 없지만... 이 때는 세수 안하고 나가기가 필수요건)

2. 뉘엿뉘엿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 달이 걸리기 시작할 때 나가는 저녁의 산책,

3. 복잡한 인파를 피해 환한 벚꽃을 보러 호젓이 슬슬 걸어나가는 봄밤의 산책, 

4. 우산을 쓰고 톡,톡, 비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비 오는 날의 산책(비의 양 주의)

5. 길고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할 때 가을이 오는 것을 알아채는 늦은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느 저녁의 산책..

6. 마지막으로 조용히 새벽에 내린 눈을 보러 나가는 어느 겨울 아침의 산책.


산책은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서도 여러가지 빛깔을 가진다. 남편과 함께 걸으며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힘든 직장 상사의 뒷담화를 하며 낄낄 거리고, 언제가게 될 지 모를 여행 계획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노후는 어떨지에 대해 자꾸 그려보고,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에 대해 서로에게 알려준다. 집에서는 나누지 못할 이야기들을 같은 방향을 보며 걷기 때문인건지 잘 나눌 수 있게 된다. 일상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이 좋다.


동네 친구와 함께 하는 산책은 또 다르다. 몇 발짝 사이에 동네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하나 더 갖고 있는 느낌이랄까 맛있는 게 생기면 나누고, 이쁜 게 생기면 나누고, 슬픈 일이 생겨도 걸으면서 나눈다. 가끔 여름밤 맥주를 들고 나가 컴컴한 공원 벤치에 앉아 두서없는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에 쌓였던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다.


내 두 발로 꼭꼭 누르며 길을 걷다 보면 알게 된다. 내가 걸어왔던 길은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비틀거리지 않고 잘 걸어왔고 앞으로의 걸어갈 길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회복할 수 있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한다.


그 마음이 잘 나타난 영화가 있었다. 

미국의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도보여행한 여행기 <와일드(원제 Wild: 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리스 위더스푼이 제작과 주인공 셰릴 역을 맡았고 로라 던이 어머니 바비 역을 맡았다.

혼자 걷기의 끝판왕

영화는 많은 명대사도 남겨 주었기에 새겨 놓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흘려보낸 시간은 얼마나 야성적인가
"네 최고의 모습을 찾아. 그걸 찾으면 어떻게든 지켜내고.."
"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는 거란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아름다움으로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단다."
"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
" 슬픔의 황야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었어."
" 앞으로 닥칠 일은 알 길이 없다... 내가 나를 용서한다면... 내가 후회했다면...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해도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없다."
"오늘보다 훨씬 끔찍한 날들도 있을거야. 거기에 질식해 죽는 것도 자유지. 근데..글쎄..난 살고 싶어."
" 문제는 문제로 남지 않는단다. 다른것으로 바뀌지."
"뭘 선택하든 자책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거니까..."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괜히 반가워서 한번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배우 하정우 님이 그랬었다.

왠만한 길은 다 걸어서 가고, 하와이는 아예 걷기 위해 자주 가신다는 배우 '하정우'님

원래도 그의 연기를 좋아했지만 걷기를 좋아하신다는 이 책을 읽고 그에게 더 친밀감이 들었다. 배우 생활이나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시간도 많았을텐데 쉽게 흔들리지 않고 오랜동안 유지할 수 있게 해 준건 걷기의 힘이 아니었을지..걷기가 그의 내공을 더 단단하게 해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갔다.



앞으로 내게 남은 길들이 어떤 날씨일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을 겪게 될진 모르겠지만 매일의 걸음은 쌓여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들이 쌓여 우리 인생을 만들어 줄 것임을 안다. 

걷기는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나를 돌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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