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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May 05. 2024

외국어를 배우는 생활

나의 세계를 조금 더 넓혀 가는 일


대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으니 1998년에서 1999년 세기말의 그 어느 계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우리 나라에 일본 영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라 일본 영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친구는 자기 언니 친구의 동아리 방에서 재미있는 일본영화를 볼 수 있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인연의 세 다리쯤을 타고 옆 대학의 어느 실에서 나는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보고 홀딱 반하고 말았다.  

  첫 사랑 순정만화를 연상시키는 남주의 모습도, 이야기의 전개도, 음악도 너무 매력적이어서 단박에 일본 영화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마음의 잔잔한 파동이 필요해질 때 보는 일본 영화가 하나 둘 생겨났다.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이 좋았다. 정갈하고 담백한 느낌. 감정표현이 과하지 않지만 미세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들의 감정선, 영화의 색감,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일본의 거리 풍경들을 보고 있노라면 힐링이 되는 순간이 느껴지곤 했다.

  러브레터 이후 두 번째로 보게 된 일본 영화는 러브레터를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 였다. 이 영화도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 였지만 짧은 러닝타임의 기,승,전,결 중 기, 승만 드러난 탓인지 러브레터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 하지만  벚꽃이 피고 지는 거리, 새학기, 봄 햇살, 비오는 장면 등등... 화면을 채우는 아름다운 풍경들로부터 일본의 봄, 4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이후 만나게 된 영화는 카모메 식당, 안경, 리틀포레스트,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등 모두 일본의 자연과 힐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영화들이었고 늑대아이, 이웃집 토토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 너의 이름은 등등의 애니메이션도 번씩은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본어가 내게 가까워 질 무렵 우리 아이들은 구몬 학습지를 시작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연산을 통해 계산력을 향상시키는 구몬 학습지.. 중이 제 머리 못 깍듯이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엄마였지만 몇 번의 시도끝에 가르치는 일은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자식들에게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일찌감치 내린 터..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구몬 학습지의 세계에 입성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공부하면 그 옆에서 엄마도 같이 공부하라'

'아이들은 엄마의 등을 보고 자란다' 등등의 말들을 몇 권의 양육서를 읽으며 공감했던 바 나도 아이들과 함께 학습지를 하려고 그 동안 영화로 친근해졌던 일본어 구몬 학습지를 시작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쓰고 몇몇의 일본어 단어를 외우며 모범엄마(?)로서의 열정을 불태우던 그 시기에 우리 가족은 마침 일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편의점의 천국인 일본에서 삼각김밥을 사기 위해 서성이던 중 어떤 재료인지 모른 채 직관에만 의지해 몇 개를 집어들고 계산을 하려던 찰나..

편의점 알바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카나?..."

'사카나?? 사카나..아..사카나..이거 학습지에서 배운 단어인데..생선이네..생선.. 이 삼각김밥 안에 생선이 들었나봐..얼른 갖다놧!!"

아마도 이 삼각김밥엔  날 생선이 들어 있는데 너네가 이걸 먹을 수 있겠니?? 라는 청년의 걱정어린 낮은 읊조림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생선 삼각김밥의 기를 나의 일본어 실력(?)덕에 무사히 모면하였다.


학습지를 통해 나름 일본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본 여행을 갈 때면 한글을 배우던 꼬마 시절처럼 더듬더듬 간판을 읽고, 지하철 노선의 역 이름을 읽어 나갔다. 식당에서 메뉴를 읽고 뜻을 알아차리는 일들이 여행을 훨씬 더 풍성하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많이 자라서 나의 손길이 더이상 많이 필요해지지 않은 요즘 본격적으로 일본어 학원을 다니며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며 언제인지 모를 그 날에 멋지게 외국어를 쓰는 자유여행자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분명히 제 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던 것 같은데 역시 남이 시켜서 하는 공부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 스스로 하는 공부라서 재미있다. 실력이 눈에 띄게 늘지 않아도 영화를 보면서 똑똑히 단어를 알아 들을 수 있게 되는 일, 자막이 아닌 원어로 들었을 때 갖을 수 있는 영화의 뉘앙스..이런 것들을 알아가는 일이 재미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어제의 나보다 조금은 성장해 간다는 느낌을 갖을 수 있는 것도 좋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느낀 점이 있었다. 영어를 쓰는 문화권은 개개인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서 모든 질문이 네가 좋아하는 것은 뭐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의 생각을 말해봐라 등등등 자꾸 나에 대해 묻는 질문이 많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어를 공부하다 보니 자신의 감정은 숨기고,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언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가 느껴지는 게 재미있었다. 

우리 말로 대화할 때보다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훨씬 더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상한 건 한국말을 쓰는 한국 문화권의 나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는 훨씬 더 밝고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어 문화권에 태어났다면 나의 MBTI가 I에서 E로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책에서 '재능'이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태도'라고 정의 내린 것을 보고 공감한 적이 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외국어 공부를 해 나간다면 나도 외국어에 재능이 있는 것이다.

시험 성적을 잘 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에 조금씩 꾸준히 하다보면 나의 세계는 지금보다 더 넓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은퇴 후 어느 날 무작정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유창하게 현지인과 소통하는 미래의 나' 그런 나를 그리며 공부를 하다 보면 조금 더 인생이 재미있어 지지 않을까?


지금부터 조금씩 뿌린 씨앗들이 열매를 맺어 미래의 내가 더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단어장에 단어를 쓰고, 중얼중얼 문장을 외워보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들을 수 있는 단어들을 찾아보고,

그렇게 조금씩 나를 키워가는 일. 이것이 또 내가 나를 돌보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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