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기로 하자
학창시절을 떠올려본다. 나는 꿈이 없었다. 기억속의 나는 되고 싶은 것도 열망하는 것도 없는 무채색에 가까운 그런 아이였던 것 같다. 무언가 되고 싶은 것도 있었겠지만 여러가지 사연들로 인하여 그 기억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던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였던 나의 모습을 자꾸 떠올려 본다. 그저 해야 할 것만 하며 보냈던 어린날과 젊은 날들에 대한 약간의 미련이기 때문인지..어른이 되고 세상을 살아보니 그렇게 무턱대로 흘려 보냈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에 대한 늦은 깨달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서야 나는 자꾸 내가 뭘 하고 싶은 지를 생각한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나는 늙어가면서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해 보고 싶고, 외국어를 배우고 싶고 제주도 일 년 살기, 세계 다른 도시에서 한 달 살기, 소설쓰기..등등등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은 중년의 어른이 되어 버렸다.
인생은 내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내 앞에 당도해 있었다. 헤매이지 않고 인생에서 해야 하는 숙제들을 무리없이 잘 해결하였으니 축복받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싶지만 정작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은 부족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얼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로 세상의 속도에 맞춰 열심히 달리기만 하다 보니 벌써 많이 달려왔다. 늘 머리속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말주머니가 되어 둥둥 떠다녔다. 가령 아침밥을 먹으면서 점심 메뉴를 생각한다던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일 출근할 때 입고 갈 옷을 떠올린다던가...가족 여행을 가면서 집에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던가...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다음 내가 해야 할 말을 떠올리고 있다던가..하는 것들이다.
늘 나는 지금 여기에 없었던 것 같다. 일상은 해야 하는 일들의 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젠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도 즐기는 자세로 하고 싶다. 요즘 평균수명이 90이 넘는다는데 평균 잡아 90정도에 일생을 마쳐야 한다면 나는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딱 절반을 달려온 이 시점에서는 머릿속의 말 주머니들을 지우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 어떤 시인의 표현처럼 소풍온 것처럼 살고 싶다.
변하는 계절을 알아채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하며, 주변 사람에게 좀더 다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그렇게 일상을 차곡차곡 쌓으며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늙어가고 싶은 것.
그런 순간들의 기록을 위하여 글쓰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