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와 "흐르는 강물처럼"이 가르치는 삶의 영원성
최근 나의 의식은 헤르만 헤세의 영원한 물길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잔잔하고도 슬픈 물길, 이 두 강가 사이를 끊임없이 유영하고 있었다. 지난달 읽은 “싯다르타”가 고요한 깨달음의 샘이었다면 지난 추석 연휴 넷플릭스로 만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폭포수 같았다.
동양의 구도자 싯다르타와 미국의 목사 아들 노먼 맥클레인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두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시대와 문화가 다르지만 그 깊은 밑바닥에서는 “강(江)”이라는 깊은 은유를 통해 삶의 정수와 인간 존재의 한계 그리고 사랑의 역설이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1. 구도자의 강과 운명의 강 : 물길의 은유
두 작품 모두에서 “강물’”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생명력 그 자체이자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나 강물의 역할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싯다르타의 강 : 이 강은 영원의 지혜를 상징한다. 싯다르타가 카말라와의 생활을 접고 깨달음을 찾아 나섰을 때 강은 그에게 물질계와 정신계 사이의 경계이자, 동시에 존재하며 흐르고 영원히 머무는 오직 하나뿐인 진리, 즉 “옴”을 가르치는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강물 소리는 수많은 인간의 목소리, 고통, 웃음, 탄생, 소멸이 하나로 녹아든 화음이며, 모든 시간이 현재에 공존한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게 한다.
싯다르타에게 강은 '시간'이라는 환영을 깨부수는 도구이자, 그를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는 안내자였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강 : 빅 블랙풋 강은 맥클레인 가족에게 은총이자 운명의 상징이다. 목사인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플라이 낚시를 배우는 행위는 종교적 의식과 같으며 완벽한 캐스팅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순간적인 구원 혹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 강은 주인공 노먼에게는 안정적인 유년 시절의 기억이자 회고의 장소지만 그의 동생 폴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격정과 파멸적인 아름다움이 투영된 공간이다. 이 강은 싯다르타의 강처럼 만물의 합일을 속삭이기보다는 폴이라는 한 인간이 아무리 아름다운 낚시를 하더라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묵묵히 지켜보는 증인이 된다.
2. 구원의 방식 : 깨달음 대 이해 불가능한 사랑
두 작품의 가장 가슴 아픈 공통점은 사랑하는 이를 구원하려는 시도의 실패와 그로부터 오는 깨달음에 있다.
싯다르타의 구원 : 싯다르타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를 자신과 같은 구도의 길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증오하는 아들의 태도를 지켜보며 역설적으로 자비의 의미를 깨닫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떠나보냈듯 아들도 자신의 길을 걷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의 깨달음은 집착하지 않는 사랑에서 나온다.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하며 구도자는 타인을 구원하려 하기보다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이 강물처럼 그들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노먼의 이해 불가능한 사랑 : “흐르는 강물처럼”의 중심에는 천재적인 낚시꾼이지만 결국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사는 동생 폴이 있다. 노먼과 그의 아버지 맥클린 목사는 폴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
영화와 소설을 관통하는 아버지의 고백인 "우리는 폴을 사랑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는 말은 인간이 타인의 운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슬프고도 겸허한 태도를 대변한다. 노먼의 깨달음은 싯다르타처럼 집착의 포기가 아닌 사랑하는 이의 파멸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다.
싯다르타가 구원의 진리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갔다면, 노먼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이라는 가장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와 씨름한 것이다.
3. 시간과 영원성 : 회고록의 역할
두 작품은 모두 주인공의 회고 형식으로 전개되며 이는 “흐름”이라는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싯다르타 : 그는 깨달음의 순간 강물에서 과거의 아버지, 사문들, 카말라, 그리고 미래의 자기 자신을 동시에 발견한다. 시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싯다르타의 회고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통합하는 과정이며 개인적인 삶의 흐름을 우주적 영원성 속에서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그의 과거 경험은 깨달음으로 가는 계단일 뿐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노먼 맥클레인 : 노먼의 회고는 깊은 상실감과 애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노년이 되어 빅 블랙풋 강가를 홀로 거닐며 이미 사라진 동생 폴의 모습을 끝없이 그리워한다. 노먼에게 강물은 폴이 살아 숨 쉬던 과거를 유일하게 붙잡아 둘 수 있는 매개체이다.
싯다르타가 강에서 모든 것을 들었다면 노먼은 강에서 폴이 사랑했던 완벽한 캐스팅의 리듬을 간절히 찾는다. 그의 회고는 과거를 영원으로 승화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기억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려는 인간적인 고투에 가깝다.
결론 : 강은 여전히 흐른다
소설 “싯다르타”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두 줄기의 강물이지만 결국 같은 바다로 향한다. 하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초월적 자비의 길을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품어 안고도 놓아줄 수밖에 없는 인간적 비애의 길을 보여준다.
싯다르타가 "구도"를 통해 득도했다면, 노먼은 "회고"를 통해 삶의 고독한 진실을 발견했다.
두 작품을 깊이 회고하며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가 아무리 고뇌하고 사랑하며 타인의 운명을 바꾸려 애쓸지라도 삶은 마치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며 그 누구도 그 흐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자비이자 은총은 흐르는 강물 소리에 귀 기울여 그 모든 소리와 침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 두 편의 이야기는 이제 내 안에서 하나가 되어 영원히 흐르는 강물이 되었다. 영화 흐르는 강물의 마지막 대사처럼. Eventually, all things merge into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