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길을 걸어가다가 바닥에 꾸깃꾸깃 구겨져있는 종이를 보면 주워서 펴보는 습관이 있었다.
생일선물을 받은 아이마냥 구겨진 종이들을 기대감에 부푼 채, 펴봤던 것이 기억난다.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혹시 나를 향한 말들일까.
그러나 대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들이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땅에 떨어진 종이들을 주웠던 것 같다.
줍고, 열고, 때때로 실망하고, 때때로 미소를 머금는 일들이 있었다.
사춘기 무렵에는 전화로 이어졌다.
시간이 비고, 옆에 누군가가 없으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과 다르게 그 때는 전화를 걸면 대부분 연결음이 3번을 넘기지 않고 전화를 다들 받았다.
전화가 연결되고, 때때로 실망하고, 때때로 미소를 머금는 일들은 계속해서 생겼다.
전화가 무료해지고 말에 대한 기대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일기로, 일기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시, 시에서 에세이로.
이상하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사람의 눈을 잘 못 마주치는 사람이 됐다.
눈을 계속해서 마주치고 있으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제로 쓴 시를 보여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가장 잘 못 마주칠 시기에 가장 글을 열심히 썼다.
글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가장 굳건히 마음 먹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읽어보면 그 시기에 쓰여진 글들이 가장 잘 읽히지 않는다.
모든 글들의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내 이야기를 전혀 쓰지 못했다.
어떠한 계기없이 4년만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작년부터에서부터야, 나를 전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작년부터,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난 후에야 눈을 마주치는 연습을 시작했다.
말들을 잃지 않으려 했다.
나의 말이던 상대의 말이던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직까지도 눈을 잘 마주치지는 못한다.
속눈썹이 참 예쁘시다는 등, 일련의 칭찬들을 들으면 눈을 마주칠 용기가 생기다가도, 눈을 계속해서 마주치고 있으면 알지 못할 불안함이 아직까지도 자주 든다.
그럼에도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이야기가 더 솔직하게 글로 쓰여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사실일지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눈을 계속해서 마주친다.
나는 눈을 마주치는 것이 길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을 싫어하고 횡단보도를 좋아하는, 달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에게 맞는 길을
아마 오랫동안 길을 찾을 것 같다.
목적지를 궁금해하며.
어제는 4인용 식탁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