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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Apr 15. 2024

갱년기 동생이 운다

사는 재미 어디에서 찾나요?

"사는 재미가 없다"


지나 온 삶 아무리 뒤져 봐도 행복했던 기억이 무채색이라며 

전화기 너머 동생의 목소리는 음습한 땅을 파고들었다.

아린 기억을 얘기하다 간간이 울먹거리는 막냇동생,

삶의 재미를 어디에서 찾아 주나요?



군대 시절

가족사진을 게시판에 붙이라고 하여 엄마에게 전화하였더니

딱히 가족사진이라고 내놓을만한 것도 없었겠지만, 하고 많은 사진 중에

동네 사람들 관광버스를 대질하여 나들이 다녔던 어느 한 때 

어른들 틈바구니에 곱싸리 끼어 찍힌 코 질질 묻은 솜털 사진을 보내주더라 하였다.

평범하고 싶었던 마음에 차마 그것을 못 붙이고 

선임들이 전역하면서 버리고 간 아무 사진 한 장 주워 대신하였다며 울먹울먹........


중학교 시절 한겨울에

띠동갑도 넘는 형이 강둑 보담으로 끌고 가 

웃통을 벗겨놓고 공부할래 말래 다짐을 받아

너무 추워서, 하는 수없이 공부하겠다 다짐 주고 옷을 입었다며 울먹울먹........ 


초 4학년 때, 

아버지가 군대에 있는 형한테 편지를 쓰라 하였는데 

형제라고 하지만 소 닭 쳐다보듯 살은 감정이라 편지를 쓰지 않았더니

아버지 밥상을 뒤엎을듯한 기세로 '학교 보내지 않겠다'는 불호령을 내려 

학교 안 가면 죽는 줄로만 알았던 순둥순둥한 마음 지뢰밭에 까무러쳐 있다 

9시 간당간당하게 교실에 들어갔다며 울먹울먹........


50장을 넘기며 쓰고 있는 책

두 번 세 번 네 번 수백 번을 넘겨 보며 

세 번 네 번 다섯 번 수천 번을 읽어 보아도 

어찌 단 한 줄도 즐겁게 쓰인 곳이 없나 한탄하며 울먹울먹........


세상사 모든 것이 심드렁한 내 동생, 

설움에 북받쳐 울먹입니다.

갱년기인가 봅니다.



밤이 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시뻘건 감정에 놀아나는 갱년기

침대랑 한 몸 된 육신 축축하게 땀에 절이는 시퍼런 감정에 놀아나는 갱년기

아침 되면 

축 처진 어깨, 흐느적거리는 발걸음, 기운 없는 목소리로 지루한 하루에 끌려나가는 갱년기

흐리멍덩한 눈, 눈부신 햇살이 따가워 눈물 한 바가지 왈칵왈칵 쏟게 하는 갱년기


어디에 숨어있다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지 여차하면 치솟는 오만불손한 감정

어디에 엎드려있다 깔딱깔딱 숨통을 조이는지 여차하면 꺾이는 가냘픈 자존


쉼 없이 달려온 지난날 깡그리 날려버리고 허무한 회색의 시간으로 갈아 끼우는 갱년기

시도 때도 없이 게릴라전으로 덤벼들어 겹겹옷 샅샅이 들춰가며 마구마구 할퀴어대는 갱년기

땀방울로 키운 꽃 한 송이, 희미한 향기의 추억마저도 앗아가 버리는 갱년기 


멍하니 한숨 쉬다 모든 것이 부질없음으로 결론 나버리던 갱년기

벼랑 끝으로 내몰아 놓고 오직 내게만 벼락을 치는 것만 같았던 갱년기 

극한의 고통에 반응 없는 무거운 머리로 오늘을 걷게 하던 갱년기 

 

그 길을 지금 동생이 가쁜 숨을 헐떡이며 울먹울먹 달립니다. 



차례대로 징검다리 건너 집을 떠나 각자 살 길 찾아 헤매었던 우리

거친 세상에 치이고 패인 상처 말하지 않아 아무도 서로를 모릅니다. 

무늬만 형제로 자라나 마음은 아직도 홀로 자취생활중인 우리

제 한 몸 지키는 것도 버거워 서로의 눈물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취방에 홀로 앉은 밥상, 꾹꾹 눌러 담다 밥그릇이 깨져버린 것 같은

자취방에 가져갈 식량, 차곡차곡 채워담다 쌀자루가 터져버린 것 같은

임계선을 탈옥한 마음, 자책만으론 더 이상 달래지지가 않았습니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 빈껍데기로 산 세월, 참았던 울음 한 번 터지니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불한당 같은 생의 변곡점, 갱년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우리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떠돌던 감정들이 서럽다고 목놓아 웁니다. 

혼자 삭이며 묻어뒀던 정리되지 않은 시간들이 불쑥 찾아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농성을 합니다.

언제나 고아였던 내면의 절규, 순응하던 외면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우성으로 매질을 합니다. 


고희를 향해 달려가고 이순을 향해 달려가건만 

아버지 헛기침 소리에도 벌벌 떨었던 어린양 그대로인 우리

꾀부리지 않고 바지런히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오늘은 가지 않고 내일이 오지 않는 갱년기의 호출에 백발만 무성히 키웁니다.



어린 시절 여름날, 

동생에게 당연 미숫가루라 여기고 밀가루를 타 준 허당 누나의 비명 

 

야박한 세월아

내 동생 울리지 마라

오뉴월에 서리 내리는 누나 있다


야속한 갱년기야

내 동생에게서 썩 물러거라

기도빨 좋은 누나 있다



동생아

물 불어난 거센 징검다리 첨벙첨벙 건너자

누나가 손 잡고 있으니 


동생아

물에 잠긴 미끄러운 징검다리 성큼성큼 건너자

누나가 밧줄 들고 섰으니


동생아

앞서 건넌 징검다리 발자국 따라 한 발만 더 내딛자

누나가 이번엔 진짜 미숫가루 한 사발 들고 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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