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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Nov 18. 2024

또 만나

호박이 부른다

호박이 참 참하더라!

많이 따다 놨는데 우짜고 싶다.

니 온다 카니, 내 내일 장날 가서 찹쌀 빻아다 놔야 되겠다.


아버지께 안부 전화하다 걸출한 호박 자랑에 껌벅 넘어가 엉겁결에 호박죽 끓이러 가겠다 약조하였다.

맘에도 없는 말, 실없이 쪼개는 말 했다간 불벼락 내리시는 아버지 밑에서 말의 무게를 배웠다.

울 아버지 오래 기다리게 하면 큰일 난다.

뱉은 말 실행에 옮기는 데는 내가 갑이다.


혼자 가기가 아직도 뻘쭘해,

다음날 셋째 언니에게 같이 가자 전화하였더니 그렇잖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단다.

아이쿠나, 잘 되었다!

언니야,

그러먼 금요일 버스터미널에서 만나.

통화를 마치고 기차표를 예매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카더만 새벽부터 비가 처적 처적 내린다.

작은 아이 등교하자마자 집을 나섰는데 바로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배차 시간이 14분이라 카더만 기다림은 한 시간의 절반이 되어가고 고향 가는 길이 자꾸만 길어진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루가 제일 먼저 반갑게 맞아준다.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손냄새를 맡아보고는 핥아보고, 이리저리 껑충껑충.

이렇게나 좋을까?

마루는 말수 적은 우리 집 사람들과는 달리 감정표현이 남다르다.

그래서 배운다.

후회가 덜 하도록 실컷 표현하며 살자 하였건만, 낯 간지러워 번번이 목구멍에 걸리고 마는 불편한 현실.

연습이 더 필요하다.



한 해 두 해 갈수록 자꾸 옛맛이 그리워진다.

밀수제비 떠 넣고 끓인 호박죽,

농사를 지어도 부족했던 쌀을 메우려고 그랬다는데, 나는 그저 호박죽이 좋기만 하였다.

긴긴 겨울밤 양푼째로 들고 와 너도 나도 한 숟가락씩 푹푹 퍼 먹던 시원한 호박죽, 꿀맛이었다!


내년이면 구순 아버지 이미 호박껍질을 벗겨놓으셨다.

호박 한 덩이만 해놓았는데 모자라면 더 해라.

충분합니더.

마당에서 불 때가 하면 되는데 비가 와서 가스 화로에서 하거라.

네~.

창고에 준비에 두마.


올해 호박 농사가 참 잘 되었는 그라.

구덩이마다 엄청시리 열어가, 여름 내내 동네 사람들 하고 나눠 먹고도 가당찮게 남았다 아니가.

너거 오빠 염소 먹인다 해서 염소 줄 겸 따다 놨더니만 내년 봄부터 키울 거라 카고,

작년에 대추 건조기에 넣어 놨더니 다 얼어가 썩카뿌고,

어디 둘 곳도 없고, 실한 것만 몇 덩이 남겨두고 밤밭에다 한 경운기 갖다 버렸다.



아버지의 진두지휘 아래 딸내미들 혹여나 큰소리 날까 슬슬 기며 손발을 맞춘다.

압력솥에 팥을 삶고,

가마솥에 호박을 삶아 으깨 으깨,

팥을 넣고 찹쌀가루를 뿌려 저어 저어 한소끔 끓어 내니 호박죽이 되었다.


저녁은 호박죽과 아버지표 무김치로 이야기가 무르익는다.

간이 딱 되었다.

아버지, 김치가 참 맛납니더!

마루가 거실창으로 빤히 들어다 본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거칠 줄을 모른다.

현관문 밖, 귀를 쫑긋쫑긋 레이더 망을 움직이며 산책 가잔 말을 찾는 마루가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날이 좋았으면 이불 빨래도 하고, 마루랑 동네를 한 바퀴 누볐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너거 산초 필요하나?

밤밭에 있는 산초 따다가 장날 들고 갔더니만 만오천 원 주더라.

저울에 달아보니 500 그람 되던데,

내 얼마 달라고도 안 했다.

주는 대로 받았다.

집에 따다 놓은 것도 좀 있고 산에도 아직 딸 것 남았다.

햇빛에 바싹 말라가 가루로 빻아가,

추어탕이나 열무김치 담을 때 조금씩 넣어 먹으면 별맛이다.

아버지 바깥에 나가시더니 산초를 들고 오신다.



언니야,

우리 어렸을 때

야들야들한 열무 숭덩숭덩 썰어가 막걸리 식초 넣고 산초가루 넣어서 한 열무 재래기 생각나?

된장찌개 끓여 두어 숟가락 떠 넣고 비며 먹었잖아.

엄마가 한 열무 비빔밥, 작은 새아재 참 맛있게 드셨는데........

지금은 아무리 해봐도 그 맛이 안 난다.

식초가 달라서 그런 것일 거다.

그럴 수도, 엄마가 집에서 만든 식초 맛이 끝내줬는데!

동네 사람들 식초 얻어가고 그랬잖아.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식초 항아리 짤랑짤랑 흔들고 했었는데........

그 식초 한 번 담아보고 싶네.

산초 씨를 바르며 옛날이야기에 흠뻑 젖는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만남은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아버지, 건강히 잘 지내시고 계셔요.

그래, 그래, 조심해서 가거라.

현관문이 열리자 마루가 달려와 "구웅 구웅" 애잔한 얼굴을 내 까만 옷에 쓱 쓱 문지른다.  

 


보내는 이, 떠나가는 이, 모두가 애달프다.

담장에 기대어 버스가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루.

만남은 짧고 작별은 길다.

정류장 은행나무 알알이 은행들이 그리움으로 영글었나?

눈물방울 송골송골 맺힌다.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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