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와 히어 사이 진땀 뺐네
"How are you?"
누가
내게
요래
묻는다면
나는
내 마음과는 별개로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답할 것이다.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넷플리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를 보고 익힌 일상 회화 몇 마디뿐이다.
아이롱이 뭐시롱인지, 영어 지문 읽기는 뜨덤뜨덤.
듣기는 고속도로에 내앉은 것 같다. 가끔 경적에 아는 체를 하는 정도.
이런 내게 영어로 물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지난 1월, 시골에 다녀올 때다.
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데
열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근래에 갈 때마다 그랬다.
정확한 시간에 데려다준다던 기차가
갖가지 이유로 적게는 10여분 많게는 20여분 연착을 하곤 하였다.
여름엔 너무 더워 철길이 녹아내려,
봄가을엔 꽃구경 단풍구경 관광객이 너무 많아,
겨울엔 너무 추워 선로가 얼어붙어 안전을 위해 서행운전을 해야 한다 하니,
거기다 대고 뭐라 토를 달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객 대기실에서 출발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나왔는데도 10여분을 더 기다렸다.
가는 날이 장날, 하필 동장군 납시어 체감 온도가 영하였다.
걱정이 천근만근 몸, 바람에 날려갈까
롱패딩에 귀달이 모자까지 꽁꽁 싸매 눈만 내놓고 있었다.
가벼운 고뿔에도 맥을 못 추는 몸,
패셔니스타는 무슨, 애저녁에 버렸다.
요즘은 뭐니 뭐니 해도 등 따신 게 최고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15분이 지나, 기차가 거북이걸음으로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3호차 중간 지점 9 A, B.
아들이 창 측 자리, 내가 바깥쪽 자릴 택해 앉았다.
뿌옇게 김 서린 안경, 코가 빨개, 귀도 빨개.
눈이 안 보여, 귀도 안 들려.
자리에 앉아 등받이를 바로 잡고, 간이 탁자를 펴고, 여장을 하나둘 풀기 시작하였다.
그때, 통로 맞은편에서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으니.
불라 불라 불라 부산?
'뭐라는 겨?' "What?"
디시즈 (인) 부산, 부산?
'This?, 이 기차는 부산행, 아하! 그렇다면', "Yes"
그랬더니,
금발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짐을 백팩에 쓸어 담고 헐레벌떡 출입문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뭐지?'
'This and Here?'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어 어 어, 어떡하지?'
'그녀가 여기서 내린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아찔했다.
전력질주로 쫓아갔다.
출입문을 나간 그녀를 향해 외쳤다.
"Hello"
"Hello"
그녀가 멈춰 돌아봤다.
Here is in 00
BUSAN is next ~
오호호 오호호, 땡큐!
자리로 돌아왔다.
한시름 놓았다.
근데 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음 역은 부산역이 아니다.
'설마, 아니겠지.'
'부산행 열차는 종착역이 부산, 기본 상식 아니든가...'
어쨌든 그녀를 무사히 구출했다는 안도감?
긴장이 풀리자
몸이 노곤노곤, 잠이 살포시 밀려왔다.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게슴츠레한 실눈은 온통 통로 건너 옆자리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 노트북을 켜고 뭔 작업을 하는지 키보드를 연신 두드렸다.
20여분 뒤 다음 역 도착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말 먼저 그리고 영어로 중국 일본어까지 차례대로.
'젓가락 살인'을 저지르는 이명 들린 내 귀로도 똑똑히 잘 들렸다.
그런데,
쑥떡 같은 내 발음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녀가
방송이 나오자마자 노트북을 접어 가방에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큰일이다!'
여기는 부산이 아니라고 빨리 말해야 했다.
다급함에 팔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This's in ~
I go to BUSAN.
BUSAN is the last station.
감 사 합 니 다!
Sorry!
'아~, 이제 되었다.'
푹 잠들었다.
종착역 도착 5분 전, 1차 안내 방송이 나오자 그녀가 지체 없이 일어나 객실을 빠져나갔다.
'Have a good trip!' 'Enjoy your trip!'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건넬 새도 없었다.
그녀는 바람같이 사라졌고
나는 기차가 완전히 도착하고 나서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여기서는 서두르지 않아도 돼. 천천히 나가자"
이미 준비를 끝낸 아들을 다시 자리에 붙들어 앉히고, 부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헐!
그녀 옆자리 남자도 BUSAN,
앞자리 뒷자리도 마찬가지,
사방이 다 부산이었다.
심지어 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금빛이었던 그녀,
사람을 골라도
하필, 사시사철 말매미 울어대는 귀를 가진 나를 골라 많이 당황하였으리라.
디스와 히어 사이,
진땀을 뺐다.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 되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