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에 산맥 있다
" 그 참! 아드님 머리 모양이 예사롭지 않네요"
"동글동글 하니 참 잘 생겼어요!,........"
"그렇죠!,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사랑스러움이 한껏 묻어나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간 동네 미용실,
싹둑싹둑 가위질 소리에 몸을 잔뜩 웅크려 눈을 찔금 찔금 깜빡거리며 긴장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던 아들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가 무심코 말을 툭 던졌다.
나는 그 말을 덥석 물고는 자식자랑 팔불출 면모를 보였었다.
내가 이리 머리 모양에 목을 매는 것은
나의 편협한 머리통을 닮지 않고, 어디 하나 각 진 곳 하나 없이 둥글둥글하니
기특한 머리로 태어나 준 아이들이 그저 고마워서다.
어딜 가나 용한 재주를 가진 친구들이 있다.
나에게 새파란 소름을 돋게 하며 시뻘건 눈깔 뒤집기 신기술을 보여주던 G
발을 굴려 하늘로 올라간 그네, 공중제비하여 땅으로 사뿐히 내려서는 공연을 보여주던 M
공 던지기 금메달리스트 J
그리고 머리에 책을 올려놓고 사뿐사뿐 천리를 걷던 친구들,
'머리에 자석을 붙여 놓았나? 어쩜 저렇게 한치의 흔들림 없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아주아주 뒤처지는 것들이 몇 있다.
머리에 이기, 아기 엎기, 공 던지기 등 등 말하고 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 던지기- 체력장 테스트에서 16m 던졌다.
감독관님이 안타까워하며 피죽도 못 먹었냐며 힘 좀 더 내 보라 하셨다.
2회째도 마찬가지 그냥저냥 던졌다.
그래도 다른 걸로 만회하여 20 만점에 만점 받았다.
아기 엎기- 우리 아이들 안아 키웠다.
등에 아이를 업고 포대기를 아무리 꽁꽁 붙들여 싸매어도
좀만 지나면 아기가 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에 이기- 내 머리 모양 범상치 않아 물건을 이는 것엔 부적합하다.
머리 정수리 3대 7로 내분되어 가운데 산맥이 우뚝 솟아 있다.
머리에 물건을 올리면 산맥 때문에 기웃 둥 한다.
키를 잴 때 어디를 내리치느냐에 따라 2센티미터 차이가 난다.
동네 아이들 대부분 짐을 머리에 이고 손으로 잡지도 않고도 살랑살랑 잘도 걸어 다녔지만
나는 그저 감탄사를 날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초 6학년 봄 가정실습기간이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너 마지기 논에 모심기를 하던 날,
엄마, 이번에는 놉(일꾼)을 잔뜩 해 놨으니, 집에 있다 점심을 챙겨 오라 하셨다.
엄마가 준비해 둔 밑반찬 서너 가지 마무리하여 찬합에 담고
아궁이에 불을 때어 냄비에 국 퍼담고,
전기밥솥 불 올려 양푼에다 밥 퍼 담고 꾀부리지 않고 까짓 했는데도 점심때가 이르렀다.
늦지 않게 들로 내어 가야겠기에
얼핏 봐선 분간이 되지 않던 미숫가루와 밀가루,
똑같은 용기에 담아 두어
나를 혼돈의 도가니로 이끈 은색 다라이에 밥, 국, 반찬통을 차곡차곡 담았다.
앉아서 따배이를 머리에 올리고, 그 위에 다라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쭐하였다.
양손으로 다라이를 꽉 움켜잡고 새색시 큰절하고 일어서듯 살포시 일어섰다.
고개가 살짝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로 대문을 나섰다.
구중궁궐 대례복을 갖춰 입고 지엄하신 내명부 어르신께 차례대로 문안인사 여쭙는 발걸음이었다.
머리 위 상전, 십리 길 휘휘 말아 올린 가체, 다라이에 짓눌린 목, 파작작 부러질 것 같았다.
건들락 건들락, 출렁출렁 야단법석 떠는소리에 너무나 조심스러웠던 내 발자국.
한 발짝 제족을 뗄 때마다 이내몸이 바들바들.
달그락달그락, 덜그럭 덜그럭, 뭔 잡담을 그리 요란스레 해대는지,
기다란 목은 총총 총총 아래로 내려앉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러가고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오르막길 올라 방천 다리에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첫발을 내디뎠다.
아슬아슬 심부름의 절정, 내리막길, 서너 걸음 떼었으려나?
머리를 압박하던 다라이, 우자작 창 창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내리려 하였다.
'쾌지나 칭칭 나네' 빗발치는 아우성,
점심 다라이 쏟을까 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서서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한 발짝 더 내딛어다가는 저승골로 가지 싶었다.
도움이 간절한데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콩만 해진 간 벌렁벌렁 살려달라 살려달라 시그널을 보내며 얼음이 된 채로 울부짖었었다.
속이 바짝바짝 하얗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였다.
나는 이제 죽었다!
어떡하지?
점심 다라이 엎었다가는 밥도 안 주고 일 시키는 악덕 지주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음부턴 우리 집일 안 해 줄 것이고,
무엇보다 아버지 고함소리 생각하니,
소리만 안 났을 뿐 골짜기가 떠나갈 듯 울고 있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 적막강산, 혼비백산, 고립무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해결책을 반드시........'
그때
저 멀리서 엄마가 논두렁을 가로질러 내게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점심때가 되어가니 '올 때가 되었는데'하고 신작로를 연신 바라보시다
위태위태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서 한달음에 달려오신 것이다.
"이리 주고 너는 집에 가서 닷되 짜리 주전자에 오찻물 가져 온나"
'그거라면 자신 있지!'
다라이 넘겨주니 머리가 얼마나 가볍던지 집으로 패내기 날아갔었다.
"아지매, 여기 물 가져왔어예"
"이 집에는 물도 맛있네!"
"참 맛나다!"
"우째 이리 다담바시 해 왔노"
"맛있네! 맛있어! 나는 한 그릇 더 먹어야 되것다"
아지매들 칭찬 소리에 혼절해 있던 정신 겨우 챙겨 밥 한 숟갈 떴었다.
내가 한 심부름 중에 최고난도 아슬아슬 심부름,
산맥 솟은 이상한 두상의 간절한 외침,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만신을 부르던 그때 그 순간 내게로 달려오신 엄마!
엄마, 보고파요!
굵은 땀방울이 후두두둑 폭발하던 여름날이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마실 나와 쉬어가던 그곳,
대낮의 열기가 말끔히 씻겨나가던 그곳,
방천 나무 그늘 아래
포슬포슬 감자, 쫀득쫀득 찰옥수수, 미숫가루 내어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엄마, 그때처럼 오늘 밤 달려와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