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펜은 칼 보다 강할까?

발로 쓰는 스트레이트, 머리로 쓰는 리포트

by Spero

기사는 발로 쓰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언론에서 출근길 문답 분석을 실시한 모양이다.

도어 스테핑 총질문수 151개, 답변 시간 1시간 25분이다.

가장 많이 쓴 단어 1위 '글쎄',

모두 59회로 '국민'(46회), '생각'(37회), '문제'(36회), '우리'(33회) 등을 앞섰다.

글쎄...란 말이 들리면 늘 오버랩 되는 인물이 있다.

외조부이시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한데 머릿속에 남아 있는 선비 이미지는 선명하다.

국민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외가에서 보름 이상을 보냈다.

그곳에서 외할아버지께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익혔다.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天地玄黃)에서 "이끼 언 이끼 재 온 호 이끼 야"(焉哉乎也)로 끝나는 천자문을 다 띠고 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부턴 명심보감을 배울 것이다. 비싼 글에는 세금도 비싸게 붙는다. 그래서 '글쎄'란 말이 있는 것이다"

국민학생에게 하이 조크를 하신 셈인데,...열 살 남짓 꼬맹이가 그 뜻을 제대로 알 턱이 없을 터...반 백 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의 말습관이 외조부에 대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그립다.


흔히 펜이 칼 보다 강하다고 한다.

글쎄...과연 그럴까?

선배들은 습관처럼 말했다.

기사는 발로 쓰는 것이야.

우리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수습의 긴 터널에서 헤맸다.

팩트 하나를 건지기 위해 경찰서 앞에서 뻗치기를 했고, 뻔한 워딩을 녹취하기 위해 기약없는 인터뷰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 세 줄 짜리 스트레이트를 송고했다. 그런 뒤 "이것도 기사라고 쓴거야!" 하는 쫑코를 먹으며 야코 죽이며 살았다. 그러면서 꿈꿨다. 발로 뛰고 머리를 굴리고, 밤잠을 설치고 쪽잠을 자면서 쓴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스트레이트 훈련을 거친 뒤 리포트를 하기 위해 카메라 기자 앞에서 마이크를 처음 들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스트레이트는 발이고, 리포트는 머리다."


왕년의 축구 스타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을 인터뷰 했을 때다.

그는 1986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의 전설 마라도나를 철벽 수비로 꽁꽁 묶었던 장본인이다.

그라운드의 진돗개란 별명답게 뛰고, 차고, 물고 늘어지는 근성있는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축구는 발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머리가 좋아야 합니다. 상대 진영을 어떻게 파고 들고, 슛을 어떻게 날려야 골로 연결되는지, 움직이는 동료에게 패스를 어떻게 해야 발끝에 갖다 놓을 수 있는지, 컴퓨터처럼 착착 계산해야 합니다. 무대뽀로 했다간 동네축구에 머물고 마는 거지요.

허 감독이 '머리'를 말 하는 동안에도 언론계 선배들은 여전히 '발'을 말하고 있을 때였다.

기사는 발로 쓴다? 정말 그럴까?

방송뉴스는 쉬운 게 없다.

스트레이트는 취재가 어렵고 리포트는 만들기가 어렵다.

1분 30초 안팎의 뉴스 리포트에는 방송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앵커멘트, 오프닝, 인터뷰, 브릿지, 클로징, 그래픽, 애니메이션...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앵커멘트를 통해 시청자를 어떻게 붙들어 맬 것인지, 스탠딩을 통해 어떻게 현장감을 살릴 것인지, 인터뷰를 통해 전문성을 얼마만큼 담보할 것인지, 화면 구성을 통해 어뗗게 공감의 폭을 넓힐 것인지, 그래픽을 통해 얼마나 이해도를 높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리포트는 리포터의 주장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차이의 계곡'을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이 중요하다. 스트레이트가 팩트에 기반한 짧은 뉴스라면 리포트는 스트레이트를 토대로 한 짧은 스토리다. 스토리는 구성이 필요하다. 무엇을 말 할 것인가 만큼 어떻게 말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립!! 논쟁적 사안일수록 양측 입장을 균등하게 반영해야 한다. 사례를 보자. 기자 이름은 000으로 처리했다.


[사례1]


[대우조선 협력업체 파업, 51일 만에 극적 타결..."노사 상생 노력"] (YTN 20220722)


[앵커멘트]

51일 동안 이어진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 파업이 노사가 극적으로 합의안을 도출하고 타결하면서 끝났습니다. 노사 양측은 임금 인상과 고용 승계 문제는 합의했지만, 민형사상 책임 면책 문제에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000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 노사는 크게 두 가지 사항에 합의했습니다.

임금은 사측이 제시한 올해 4.5% 인상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파업 기간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조합원은 다른 업체로 고용을 승계하는 방향으로 정리했습니다.

다만, 민형사상의 면책 문제와 관련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사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에 성실하게 협의하는 과제로 남겼다고 밝혔습니다.

[홍지욱 / 금속노조 부위원장 : 이 사태가 엄중하기 때문에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민형사 면책 관련해서는 남은 과제로 남겨놨다….]

긴 시간 만큼 노사 양측은 합의에 진통을 겪었습니다.

노조가 애초 요구했던 임금 인상은 30%, 노조는 5%로 양보한 안을 제시했다가, 사측의 4.5% 제안을 받으면서 협상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하지만 손해 배상 문제와 파업 기간 일자리를 잃은 노조원의 고용 승계 문제가 막판 협상에 발목을 잡았습니다.

대화와 양보로 신뢰관계를 쌓았다는 노사 양측 관계자의 말처럼, 진통 끝에 그리고 극적으로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홍지욱 / 금속노조 부위원장 : 그동안 국민의 지지와 걱정, 염려 덕분으로 이렇게 잠정 합의에 이르렀음을 보고드리고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피를 말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사는 이번 협상 타결을 계기로 노사 상생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권수오 / 대우조선해양 협력사 대표 : 노사 상생발전을 위해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대우조선발전과 조선 사업 발전을 위해 더더욱 대우조선 협력사가 앞장서 일하겠습니다.]

노사가 극적으로 협상 타결을 이루면서 그동안 우려가 컸던 공권력 투입 등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은 막았습니다.

YTN 000입니다.


노사 양측이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양측의 입장을 균등하게 처리했다. 다만 인터뷰에 있어서 노측이 두번 나오고 사측이 한 차례만 언급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균등한 시간 배분(Equal time)은 미국 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연방통신위원회)의 형평성의 원칙(Fairness Doctrine)의 기본이다. 영국 BBC의 적절한 공정성(Due Impatiality) 개념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정당 리포트의 경우, 여야 양측 입장을 반드시 균등하게 반영해야 한다.


[사례2]


["탈북 어민 진술 일부 차이"...북송 경위 공방 격화] (YTN 20220722)


[앵커멘트]

3년 전 탈북 어민 북송 사건 당시 이들 어민 2명의 진술 일치 여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살인을 자백한 탈북 어민들의 진술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는 건데, 북송 사건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 수위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000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 2019년 11월 북송된 탈북 어민 2명의 진술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 업무 보고를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이렇게 답한 겁니다.

다만 통일부가 가진 기존 자료 중에는 진술 불일치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살인 방법이나 피해자 숫자 등 구체적 진술에 약간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살인 자체는 인정한 만큼 탈북 어민들이 실제 살인했을 개연성은 높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제는 '강제 북송'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공범들끼리 자백을 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 사법체계에서 처벌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국민의힘은 당장 문재인 정부를 향해 더 날을 세웠습니다.

전 정권이 미리 북송으로 결론을 정해놓고 꿰어맞추다 보니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탈북 어민들을 흉악범으로 단정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한기호 / 국민의힘 '국가안보문란 실태조사 TF' 위원장 : 합동신문 결과가 의문투성이인데도 정의용 전 안보실장은 두 사람의 증언이 완전히 일치했다고 거짓말을 하며 '희대의 역대 살인마'라고 악마로 만들었다.]

오는 29일에는 북송 사건 현장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직접 찾아 당시 상황을 검증하기로 했습니다.

민주당은 이 같은 파상 공세에 발끈했습니다.

16명을 살해한 흉악범들을 추방했을 뿐인데도, 정부와 여당이 정략적 의도를 갖고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고 받아쳤습니다.

당시 문재인 정부가 잘못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공개하고 토론하면 될 텐데 남북, 나아가 남남갈등을 조장한다며 쏘아붙였습니다.

[기동민 / 더불어민주당 의원 : 당당하게 그때 문재인 정부가 잘못했다, 추방이 아니었다, 강제북송이었다 이런 증좌가 있으면 내놓고 토론하면 될 거 아닙니까.]

3년 전 탈북 어민들의 진술이 일치한다고 국회에 보고했던 통일부는 최근 불거진 의혹에 대해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말을 아끼는 상황.

[이효정 / 통일부 부대변인 :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어렵고 수사 결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로 예정된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는 당시 북송 경위를 놓고 여야 간 치열한 진실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YTN 000입니다.


스트레이트는 정찰가가 붙은 뉴스 상품이다. 뉴스공장 컨베어벨트를 통해 나오는 공산품이다.

리포트는 저마다 가격이 다른 뉴스 상품이다. 디자인이고 패션이다.

잘 만든 리포트가 잘 팔린다. 세상을 바꾼다.


펜은 칼 보다 강하다.

글쎄...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