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팔과 다리를 가누지 못했다. 빳빳하게 허리를 세우고 주저하는 사이 상대방의 기술에 내 몸은 휘청거렸다.
"어떠세요? 할 만하세요? "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집에 가면 체육관에서 배운 동작이 계속 맴돌아요."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몸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몸이 기억해야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았다. 순간 멈칫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킨 것 마냥 얼굴이 달아올랐다. 몇 번의 수련만에 정체를 들킨 것 같았다. 몸의 움직임만으로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가 싶었다. 바다 모래처럼 가늘고 촘촘하고 끈끈한 생각의 알갱이들이 나를 붙어 다닌다. 종종 그것들에 짓눌려서 버둥거리기도 하고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댄다. 움울하고 거친 생각의 고리에 얽혀서 길을 잃고 망상의 숲을 헤매기도 한다. 집에서는 매듭짓지 못한 일을 되뇌고 일터에서는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되새겼다. 어디에 있어도 생각의 회로는 멈추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나는 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느라 몸 쓰는 일에 인색했다. 게다가 머리 쓰는 일이 몸 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잔뜩 머리에 이고 끙끙대느라 음울해진 사람이 되었다.
수련장에 들어서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던 생각의 회로는 저만치 비켜섰다. 눌어붙은 상념의 찌꺼기를 손쉽게 털어냈다. 오직 내 몸을 조절하고 움직이고 쓰는 일에 바빴다. 지금 체육관에서 수련하고 있는 내 몸과 네 몸을 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직장에서 들었던 헛소리도 집에서 실랑이하는 사춘기 남매와 갱년기 남편도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전 나를 속박했던 모든 것들과 가볍게 이별했다. 자연스레 생긴 일상의 거리만큼 자유로움을 느꼈다. 오로지 사지육신을 움직이고 쓰는 일에 분주했다. 숨이 차오르고 벨트와 도복이 풀어지고 흐트러졌다. 순간을 모면하느라 넘어지고 쓰러지고 일어서고 눌리고 버티고 내빼는데 급급했다. 벌게진 얼굴을 한 모습에서 생기를 느꼈다.
지난번 수련 때 스파링 상대가 될 뻔했던 덩치 큰 성인 남성 수련자를 다시 만났다. 며칠 후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한다고 했다. 스파링을 제안하는 눈빛이었다. '아뿔싸, 기술도 모르는 내가 저분하고 수련을 한다고? 체격도 한참이나 차이가 나는 데?' 겁을 먹은 난감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지난번처럼 당황하고 어색한 건 나뿐이었다. 관장님이 잔뜩 위축된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웃는다.
"누님은 이 친구랑 하세요."
"네? 저분 하고요? 그런데 제가 관장님보다 누나인가요?"
당연한 일이라는 듯 관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님이세요. 수련생 잠깐 쉬고 다음번에 이 누님이랑 하면 돼. 아직 잘 모르니까 잘 가르쳐주면서 해"
(노련한 선배에게 가르침 받은 시간)
이런 곳에서 누님으로 불릴 줄이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흔다섯 아줌마라고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했던 첫날이 떠올라 느닷없이 부끄러워졌다. 알고 보니 체육관에서 내가 최고령이었다. 과연 최고령 초보 누나는 잘 버틸 수 있을까?
다섯 번의 수련 후 양쪽 허벅지 앞쪽 근육과 복근에 수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팽팽한 끈 하나를 덧붙인 것 같은 기분 좋은 아릿함을 느낀다. 고작 며칠 안된 수련의 기억이 몸에 새겨지고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은 명쾌하고 정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