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짓수 스파링은 수업 중 배운 기술을 중심으로 상대방과 몸을 부딪히며 훈련하는 시간이다. 한 시간의 수업 중 절반은 관장님의 기술 설명과 시연이 있고 이후 스파링을 통해 관원생들끼리 기술을 익힌다. 기술을 머리로는 습득했으나 몸으로 체득이 더딘 나는 자주 곤경에 부딪혀 고꾸라지고 뒹군다. 유색 벨트나 몸놀림이 유련 한 수련생들은 앉아 있는 상태로도 위(탑)에 있는 상대의 공격에 여유 있게 맞선다. 공격하는 자(탑)와 막는 자(가드)의 팽팽한 긴장감은 기본이다.
오늘의 스파링 파트너는 유색벨트의 젊은 수련생, 여유 있게 앉아 있는 그녀의 양 발목을 내려 누르고 내 오른쪽 무릎을 그녀의 왼쪽 무릎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상대방의 왼쪽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가 상체 쪽을 뚫고 제압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오른쪽 무릎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상체의 무게가 앞으로 쏠렸다. 상대가 오른쪽 발로 내 골반을 살짝 밀면서 상체가 완전히 앞으로 고꾸라 졌다. 이미 상대는 내 위에 올라와서 제어력을 잃은 다리를 쥐고 있었다.
문제는 무게중심이었다.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내 몸의 균형을 놓치고 있었다. 무게중심이 상대방에게 쏠려있어 균형이 무너지고 흔들렸다. 쉽게 넘어지고 흐트러졌다. 상대의 방어를 뚫고 들어가는 것보다 내 몸의 무게 중심을 맞추고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먼저였다.
체육관에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이다. 관원생 평균연령이 25세 정도라고 보면 된다. 간혹 나와 비슷한 연배의 중년 남성들이 있기는 하나 마흔의 중턱에 들어선 아줌마는 없다. 체육관의 평균연령을 깎아먹고 있는 셈이다. 가끔 젊고 패기 어린 친구들의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을 보면 내 모습이 굼뜨고 무거워 비교가 된다. 몇 번 연습하고 나면 금세 수월해지는 그들에 비해 나는 느리고 더디다. 중년의 아줌마가 유별나게 까분다고 하지는 않을까 시선을 의식하기도 한다. 무모한 아줌마의 치기를 비웃지는 않을까 낯부끄러워지기도 한다.내 몸을 돌보고 살리겠다고 시작해 놓고는 남의 몸을 보고 움츠러든다. 젊은 친구들의 능숙한 스파링을 부러워하다 무게 중심을 타인의 몸에 빼앗겼다.
일상이 빡빡해서 한동안 주짓수 수련을 쉬던 친구가 오랜만에 체육관에 나타났다. 쉬는 동안 바쁘게 지낸 일상을 즐겁게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니 청춘의 생기가 느껴졌다. 30대 초반이었던 그 젊음이 뿜어내는 생동감이 부러웠다. "뭐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겠네" 부러움을 잔뜩 담아서 그 친구에게 건넨 말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며 문득 지금의 나도 뭐든 하고 싶은 거 해도 되는 못할 것도 없는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내가 30대의 나를 떠올리지 못했고 30대의 내가 마흔다섯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현재의 나는 현재로서 존재한다. 과거에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후회하기에는 아직 나에게 남은 날들이 많다. 그녀의 젊음을 시기하다 무게 중심을 시간에 흘려버렸다.
승진을 한 직원이 감사인사로 떡을 돌렸다. 그의 승진에 내가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걸 받아먹어도 되는 건가 하며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유난히 쫀득한 떡을 먹으며 생각했다. 승진한 그가 부러운 건가? 승진해서 주목받는 그가 부러운 건가? 나와 다른 길을 가는 그녀의 세계와 시간을 상상하는 동안 무게 중심이 무너졌다.
시간은 감정을 흐릿하게 만든다. 사랑이 처음과 같은 농도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명력이 다한 감정은 붙든다고 되살아나지 않는다. 내면의 결핍은 관계에서 채울 수 없다. 애착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내가 원하는 수용이나 애정을 충족할 수 없는 관계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관계를 통한 기쁨에 의존하다가 무게 중심을 타인에게 넘겨주었다.
상실감에 허덕이던 자리에는 독립과 성장이라는 보물이 숨어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차게 움직이는 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땀방울이 오늘의 나로부터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매일 차곡하게 쌓이는 일상에서 무게 중심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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