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과 집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다 가는 골병이 들거나 하나를 포기하고야 말지 않을까 싶다. 주변의 동료도 선후배도 일하는 엄마로 사는 일에 번민한다. 퇴근하고 나면 이불속으로 몸을 숨기고 어둠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아이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빠가 집에 있어도 엄마를 찾는다. 왜 나는 퇴근해서도 쉴 수가 없을까? 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뒹굴거릴 수 없을까? 온갖 애교와 협박을 섞어서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이 모든 관심과 애정을 잠시 거두어 주었으면 하고 얄궂은 마음을 품는다.
집안을 들썩이게 만드는 모든 소란에서 멀찍이 떨어져 코를 골고 있는 그를 보면 속이 터진다. 나도 낮에 일을 하고 너도 일을 했는데 너는 왜 저녁이 되면 자유로운 것인지? 그러고 있지 말고 집안일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엉덩이를 발로 차버릴까? 그런다고 내게 바짝 붙어있는 아이들이 떨어질 리도 없고 미안하다고 사과할 리도 없고 잠 깨웠다고 잡아먹을 듯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무심한 그와 실랑이 벌일 기운도 없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또 차오른다.
주말 아침에도 나는 엄마의 일을 한다. 집안을 청소하고 먹일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정리한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오가고 아이들을 돌본다. 물론 일하는 아내에게 너그럽고 육아와 집안일에 협조적인(?) 남편이 있다. 막내의 하원을 도맡는 날이 정해져 있고 가족의 식사 준비를 혼자 하기도 한다. 그는 집에서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나는 빨래와 식사 준비를 한다. 성장한 두 남매의 일상은 그가 손길이 많이 가는 막내는 내가 보살핀다. 남편은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자신한다.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다. 크게는 그러하지만 좁게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시간은 그는 집에 없다. 시간의 총량으로도 밀도로도 내가 우위다. 구조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일하는 부부의 일상을 이렇게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언제까지 일은 같이 하지만 가사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전형적인 가정의 모습이려니 적당히 만족하고 맞추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기울어진 시소를 뜯어고칠 방법을 찾고 싶다.
유자녀 남성과 유자녀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의 분량은 같지 않다. 그는 주당 40시간을 채우고도 그 이상의 것을 쏟아내기를 요구받는다. 잔업을 위해 야근을 하거나 누적된 긴장을 덜어내려 술잔을 기울인다. 몸도 마음도 금세 소진될 수밖에 없다. 주말에 집안에서 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아이를 가진 여성은 40시간이 빠듯하다. 종일 돌봄에 묶여있을 아이가 떠올라 딴짓을 할 수가 없다. 일과 돌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쩔쩔맨다. 엄마의 돌봄을 원하는 아이를 곁에 두고 쉴 수가 없다. 그녀에게는 아이와 신나게 놀아줄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일과 돌봄은 서로를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여겨질 뿐이다.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여성을 몰아 놓고 결과물을 독촉하고 엄격하게 평가한다.
일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구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 육아와 가사를 둘러싸고 그와 나의 욕구가 충돌할 때면 누가 먼저 달려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신경전을 벌인다. 옳지 않지만 어린아이를 둔 아내의 욕구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일하는 아내가 손발을 써가며 곡예를 하고 있어도 그는 자기 욕구를 앞세운다. 엄마라는 이유로 육아와 가사를 고스란히 떠맡으며 양보를 선택한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가사노동이 오히려 그를 해방시켜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남성으로서 사회가 부여하는 기대치를 쫓기듯 안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열심히 내달리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 인지 자문하게 된다. 남편은 밖에서 아내는 집에서 녹초가 되어서 토요일 아침이면 아무것도 할 힘이 남지 않은데 말이다.
남편이 집에 있으나 없으나 가정에서 나는 직장에서처럼 바쁘고 부산했다. 육아와 가사를 둘러싼 모든 다툼과 협상은 의미가 없었다.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지금 당장 할거 없잖아?' '내가 나중에 한다니깐' '그냥 너도 안 하면 되잖아' '저녁은 안 먹을게' '왜 자꾸 불러?'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고작 이런 말을 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손에 든 리모컨을 집어던지고 뒤통수를 휘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남자를 살살 달래고 얼러서 요령껏 부려먹을 수 있다는 언니들의 조언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육아와 가사가 뒤섞인 현실에서 그러한 기교를 구사할 만큼 나는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여자가 되지 못했다.
출산 이후의 저녁을 떠올려본다. 대개 아이들과 함께였다. 아이가 잠든 시간을 음미하고 싶지만 자장가를 부르다 잠들었다. 어쩌다 저녁 모임이 생기면 아이 없이 먹는 밥이 어색했다. 아빠인 그의 저녁은 어떠했을까? 야근을 하거나 야근 후 술 한잔을 하거나 그는 주로 집에 있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은 새벽에야 집에 오곤 했다. 정시에 퇴근해도 소파에서 졸다 아이들과 내가 잠들면 해가 뜰 때까지 영화와 뉴스를 보았다. 아침에는 아이들을 달래고 먹이고 입혀서 챙겨놓으면 그제야 허둥대며 출근 준비를 했다. 주말에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퇴근 후 늦은 시간이나 주말에 연락이 와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이가 있는 남자이지만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가정마다 각각의 사정과 모양새가 다르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개인적 처지와 상황을 기준으로 하기에 편협할 수 있다. 하지만 출산 이후 엄마가 된 나의 저녁은 아빠와는 달랐다. 온전히 육아에 묶여 직장일 이외에는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엄마라서 저녁은 무조건 집에 아이들을 살피며 집안일을 했다.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역할에 몰입했다. 종종 스스로 만든 고생길에서 소모되고 있다는 억울함이 들을 때면 잔뜩 신경질이 난 얼굴을 하고 아이들을 쏘아보았다.
남편은 학위를 준비하며 강의하는 일을 하다가 막내가 태어나면서 프로젝트 사업의 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계약직이고 나는 정규직이다. 초기에는 그의 연봉이 높았지만 얼마지 않아 내가 앞섰다. 우리도 평균적인 가정의 편협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회적인 통념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가정의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다. 아빠의 위상을 지키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빠보다 많이 버는 것이 가정 내에서 아빠의 위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도 검증되지 않은 성별적 편견을 내재화하고 있었다.
가끔 남편은 아내를 외조하는 전업주부가 되겠다고 말한다. 일하는 아내를 향한 공수표다. 실제로는 아내에게 의존하면서 아닌 것처럼 허세를 떤다. 휴직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무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친년처럼 널뛰는 아내를 보고도 꼼짝하지 않는 그의 말은 거짓이다. 양치기 소년인 그가 습관처럼 뱉어내는 약속은 달콤하다. 보살핌의 구속에서 벗어날 기회가 될 것만 같은 몹쓸 희망을 준다. 그는 살림하는 남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다.
불평등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번의 출산과 휴직을 지나면서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조금씩 부부의 양육과 가사분담의 균형은 기울어졌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가 집안일과 육아의 수레바퀴에 갇혀서 소모되었다. 육아로 세상과 단절되다가 여성이 쌓을 수 있는 경력과 능력의 한계를 맞닥뜨렸다. 아이를 안고 전전긍긍하며 고단함과 불안감이 쌓여갔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하는 빠듯한 일상이 이어졌다.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육아와 가사노동의 전선에서 동지인 듯 아닌 듯 허무맹랑한 말을 주고받으며 복닥이는 날을 살 것이다. 건조기의 알림 소리를 듣고도 서로 모르는 척하다가 밥 먹고 난 그릇이 많다고 투덜대다가 양말과 옷을 찾으며 옷장을 들쑤시다가 쏘아대고 빈정대며 싸울 것이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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