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고 못할 것이 없는 시대라고 배우며 성장했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일이 많았다. 다른 미래를 꿈꾸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일과 사랑에서 직장과 가정에서 잘 해내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멋지게 성장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첫 번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능력보다도 성별 앞에서 가로막히는 일이 많았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유보되는 것들과 날아가는 기회를 잡으려는 마음, 아이들이 어릴 땐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체념하는 마음 사이에서 번민했다.
수직적인 위계와 폐쇄적인 문화가 배어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젠더 감수성 그런 것은 없다. 문화도 사람들도 무지하고 빈곤하다. 법이 정해준 의무만을 가까스로 지키는 것이 전부다. 여성의 성장과 안착을 유도하는 정책이 있지만 그보다 많은 그물망과 걸림돌은 제도보다 유효하고 강력하다. 직장과 육아는 별개라고 하다가 별개가 아닌 것으로 만들면서 유자녀 여성을 통제한다.
나의 세계는 결혼과 출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흔히들 남성이 돈을 벌고 여성이 살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보기 좋고 무난하고 애들에게도 좋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런 믿음은 어디서 시작되고 확장되는 것일까? 기혼 여성에게 의례적으로 하는 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무작정 따라 하기를 다그치는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꼈다.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규칙들에 얽매일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누가 여성의 삶을 정해놓은 것일까? 왜 유독 여성에게만 정해진 길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의 능력과 권리와 생존의 조건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훼손되고 폄하되는 것을 보았다. 남성의 배경으로만 존재하기를 강요하며 반대편으로 가기를 선택하고 저항하는 여성을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제한된 여성성과 전형적인 모성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선언하는 여성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용감무쌍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모르는 척한다. 그러한 여성이 사라지거나 침묵하기를 바란다.
직장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뛰어나려고 해서도 뛰어나서도 안된다. 권력을 소유한 남성의 배경으로 있어주기를 강요한다. 권력과 명예를 원하는 야망이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숨겨야 한다. 야망을 드러낸 여성의 행동을 위험신호로 여기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주홍글씨를 새긴다. 가정이 있는 여성은 육아와 가사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노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아이를 셋이나 두고 도대체 뭘 하려고 그래? 어린애들을 두고 네가 뭘 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그냥 적당히 해?' 아이를 이유로 양보를 종용한다. 회사가 언제부터 양보하는 곳이었나? 이런 이야기들이 아직도 힘을 얻는다. 자녀가 있으니 일을 적당히 하라니 배려가 지나치다. 양육과 돌봄을 특권으로 쓴다며 비난하다가도 편의에 따라서 자녀를 끌어들인다.
어린아이를 두고도 열일하는 여성동료가 굉장하다며 놀라워한다. 남성동료와 상급자는 자기의 어린아이들이 방치되지 못하게 아내를 집에 두고서 말이다. 남성에게 요구하는 사회적인 기대치 이상의 과업을 수행하는 여성을 보고는 당황해한다. 여성에게 일에서 유능함 보다는 일상적인 보살핌의 영역에서 수고를 기대하는 정서가 보편적이다. 엄마인 당신의 노력은 유자녀 여성으로서 과하다고 평가한다. 당신의 성실함을 걱정하고 염려한다.
그들은 일하는 아빠에게는 묻지 않는 질문들을 일하는 엄마에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성동료에게 애들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늦게까지 있어도 되나? 애들은 누가 보는 건가? 보살핌과 가사에 관한 질문을 수시로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인데 유자녀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확인한다. 직원 앞에 아이가 몇 명인 여성이라는 수많은 괄호를 따라 붙인다. 아이를 떼어 놓은 것이 그리도 걱정된다면 휴직하는 직원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육아 휴직하는 여성의 후임자를 대놓고 남성으로 요구하면서, 아이 돌봄 휴가의 진심을 의심하면서, 임신으로 일을 피한다고 말하면서, 보육기관에서 잘 지내는 아이를 엄마의 직장으로 불러낸다. 육아가 일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하다가도 여성을 위한 배려라고 말하며 아이 돌봄에 꽤나 후덕한 것처럼 굴기도 한다. 성실한 여직원을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중요하고 어려워서 후한 성과와 평가가 보장된 일은 맡기지 않는다. 아무도 해결하지 못해 꼬일 대로 꼬여버린 과제를 떠넘기기도 한다. 생존할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것일까? 유자녀 여성에게는 까다로운 리트머스지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아이를 가진 여성이 일에서 성과를 내는 것을 의심하고 못마땅해한다.
십여 년 전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주변에 일하는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늙고 물렁물렁한 아저씨들만 득실거렸다. 물론 그때는 70-80년대가 아닌 21세기 2000년대였다. 직장여성은 드물었고 여성 상사는 거의 없었다. 여성 신입직원에게는 매일 할 일이 있었다. 상사의 냉장고, 직원들의 간식거리와 책상 정리(재떨이 비우기 포함)였다.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오면 앉아 있지 못했다. 집에서도 하지 않았던 차 심부름을 해야 했다.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취급했다. 신입 여직원은 어떻게든 맛있게 커피와 차를 타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어색하고 어정쩡한 미소로 차를 내주는 일에 익숙해질 즈음 다른 부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얘 왜 너랑 같이 입사해서 OOO부서로 간 동기 무개념이 있잖아. 걔가 그렇게 싹싹하게 일을 잘한다더라"
"그래?" "어... 걔가 와서 사무실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그러더라고"
신입여직원을 평가하는 첫 번째 요소는 애교라 말하는 싹싹함이었다. 여직원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사무실의 꽃이 되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 했다. 직원들에게 애교를 떨며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일에 힘써야 했다. 상냥하고 공손한 태도는 기본이었다. 따박따박 따지며 거절하고 싸우는 일을 참아야 했다. 지금이라면 그런 것쯤이야 평가기준이 되겠냐고 무시했겠지만 그때는 평가에 예민한 신입시절이었다. 없던 애교를 끌어모을 궁리를 했었다.
경력이 비슷한 두 여성 선배가 승진대상자로 경쟁하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이 오갈 정도로 상황은 뜨거웠다. 모두가 잠재적인 경쟁자인 직장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보통 때와는 달리 주변 반응이 사뭇 뜨거웠다. 사람들의 평가가 엉뚱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자들끼리 싸운다.' 진부하고 편협한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승진에 눈이 멀어서 평가에 집착하며 서로를 물어뜯는다고 헐뜯었다. 여성이 경쟁자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었다. 많은 동료들이 집단적으로 그것에 동조했다.
성과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왜곡된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삐뚤어진 방식으로 여성을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고 내몰았다. 경쟁자의 성과는 뒷전이 되고 당신은 가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양보를 강요했다. 경쟁자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행동하는 방법을 몰랐다. 일하는 사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 일터의 생존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것이 더 이상 핑곗거리도 배려의 이유도 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익숙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익숙한 언어로 말했다. 그것이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학습하고 내재화했다. 여성의 성공을 유난히 강인한 여성의 빛나는 성취로 확대하는 일도 여성의 피해를 유난히 불운한 여성의 나쁜 경험으로 축소하는 일도 흔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여성이 수많은 남성 동료들의 적의를 피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했다. 직장에서도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잡은 고기를 담아서 덜어 주는 일에만 참여하기를 원한다. 추진력을 발휘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의견을 주장하며 성과를 향해 달리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선택과 접근을 제한하려고 유자녀 여성이라는 이유를 들이댄다. 여직원에게 용인될 만한 방식과 태도를 정해놓고 순응하기를 강요한다. 불공평하고 척박한 환경을 인식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맞서 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여성이라서 밀린다고 분에 하다가도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려 성과에 전념이나 할 수 있을까 주저한다. 곤경에 처한 워킹맘은 직장에서 제시하는 타협의 유혹에 굴복한다. 막내가 몇 살이라고 했지? 아직 손이 많이 가겠네. 애들이 어릴 때는 그것도 괜찮아. 그냥 여기 있다가 조금 기다려. 아... 그래... 사실 지금의 내가 그렇지... 일하는 것도 아니고 육아하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삶, 그게 지금의 나였지.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지 싶다는 생각에 은근슬쩍 제안을 수용한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멈춰 서기를 선택한다.
회의 중 울리는 알람과 전화는 내가 아이 엄마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시켜 준다. 아침이 부산스럽고 정신없던 날은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아 컴퓨터 전원을 켜놓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여긴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아침부터 이렇게 소모되는데 일은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컴퓨터에 손댈 힘도 없는데 새로운 과업에 도전하며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일하는 여자들이 느끼는 유리천장이 이런 것일까? 여성과 엄마를 지우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입지를 지키려면 얼마나 더 독해져 할까? 현실이 육아와 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몰아가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돌봄의 주체로 사는 걸까? 내 삶의 주체로 사는 걸까? 언제까지 남편과 아이의 선의에 의지해야 할까?
아이를 가진 여성이라서 밀린다고 분에 하다가도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려 성과에 전념이나 할 수 있을까 주저한다. 곤경에 처한 워킹맘은 직장에서 제시하는 타협의 유혹에 굴복한다. 막내가 몇 살이라고 했지? 아직 손이 많이 가겠네. 애들이 어릴 때는 그것도 괜찮아. 그냥 여기 있다가 조금 기다려. 아... 그래... 사실 지금의 내가 그렇지... 일하는 것도 아니고 육아하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삶, 그게 지금의 나였지.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지 싶다는 생각에 은근슬쩍 제안을 수용한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멈춰 서기를 선택한다.
회의 중 울리는 알람과 전화는 내가 아이 엄마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시켜 준다. 아침이 부산스럽고 정신없던 날은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아 컴퓨터 전원을 켜놓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여긴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아침부터 이렇게 소모되는데 일은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컴퓨터에 손댈 힘도 없는데 새로운 과업에 도전하며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일하는 여자들이 느끼는 유리천장이 이런 것일까? 여성과 엄마를 지우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입지를 지키려면 얼마나 더 독해져 할까? 현실이 육아와 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몰아가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돌봄의 주체로 사는 걸까? 내 삶의 주체로 사는 걸까? 언제까지 남편과 아이의 선의에 의지해야 할까?
<사진출처: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