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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Aug 12. 2021

너와 나 사이의 거리

맑은 얼굴로 반갑게 엄마를 반겨주는 아이의 표정에서 안도감과 나른함이 동시에 찾아든다. 일에 몰입하다가 만난 아이의 눈망울이 예뻐서 웃음이 났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이를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엄마로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다고 느낄 때 아이와 사이에 거리가 필요했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가 나와 아이를 편안하게 했다.


냉장고에 채워놓은 재료들과 음식들을 헤아리며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고민한다. 땅속으로 꺼지듯 누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줘야 한다. 아이들도 저마다의 하루를 살아내고 이제야 집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내 몸 하나도 귀찮지만 급히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두른다. 입안은 까칠한데 배가 고파서 숨 가쁘게 저녁을 먹는다. 이제 가만히 소파에 붙어있고 싶지만 엄마 사정을 알 리 없는 막내는 장난감을 얼굴에 들이대며 놀아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몰려오는 피로를 물리쳐 보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흐릿해졌다. 퇴근 후 세 시간 남짓 짧은 시간 아이가 원하는 엄마의 품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는 것일까?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면 서둘러 이불을 펴고 재우기에 바빴다. 가끔 시한이 정해진 업무나 긴급한 보고가 있으면 아이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책상 앞에 다시 앉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금세 커버린 아이의 시간은 나에게는 더디기만 했다. 나에게 육아는 완성해 내야 하는 하나의 과제이자 업무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저녁을 빨래를 청소를 해야 다. 회식과 야근을 오가다 생존 신고를 하는 동반자(?)와 반찬만 놓고 가 어미를 원망해 본들 내 일상 달라질 게 없다. 일하는 여자의 삶이 일과 육아와 집안일의 무한 굴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그들이 필요치 않는 아내와 어미가 필요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일을 하듯이 종종거리는 내 처지에 연민을 느낄 때 더욱 간절해다. 보탬도 되지 않을 쓸모없는 자기 연민만 늘어났다.


출동 놀이에 빠진 막내가 입으로 소리를 내며 집안을 뛰어다니고 있다. 이용 이용 소방차 소리 삐뽀삐뽀 경찰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쯤 되면 집에서 나는 소리인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정신이 산란해진다. 악당도 되었다가 보안관도 되었다가 1인 2역이 맡겨졌다. 실제상황처럼 현실감을 극대화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움직여야 한다. 막내의 눈에 들려고 온 힘을 다해 열연을 펼쳐본다. 핸드폰을 보던 남매도 조연으로 활약해 주었다. 연극은 절정에 다다르고 역할에 몰입된 배우들은 이곳이 집이라는 것을 잊다. 칼이 날아다니고 총알이 난무한다. 이 소란 가운데서도 초연해 보려 해 보지만 눈이 무겁다. 막내의 눈을 피해 구석에 숨었다 딱 걸렸다.  자는 일이 인간이면 누릴 기본 권리이건만 막내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엄마는 배고프고 졸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절정으로 치닫는 연극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씻을 일이 남았다. 어떻게든 목욕탕으로 발길을 돌리게 해다. 누나 찬스를 쓰기로 했다.(딸내미 너란 아이는 내게...) 막내는 누나의 살가운 말 앞에서는 무장이 해제된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혀서 침대에 눕혀야 다. 물놀이에 빠진 막내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테트리스 레벨업 할 때도 이렇게나 진땀을 빼지는 않았다.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4살의 아이가 처음이 아닌데 처음인 것 같다. 안 자겠다 우기던 녀석이 우유를 먹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소리에 잠이 들었다. 오늘의 미션을 모두 마쳤다. 엄마의 하루가 끝이 났다. 아이가 잠들고 하고픈 일을 떠올리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니 아침이다.


피곤해서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침대로 도망가버린 내 곁에 누운 막내 오늘의 일과를 종알종알 이야기한다. 고단한 기색을 숨기려 눈을 감고 추임새를 맞추었다. 참아둔 짜증이 터져 나오려는 기색에도 끝나지 않는다. 하나라도 빠짐없이 전부를 되새기려는 듯 묘사하고 표현하였다. 신의 감정 친구의 태도 선생님의 가르침 하루 동안 아이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영화처럼 선명하게 펼쳐졌다. 매일 같은 날에도 즐거움과 이야깃거리를 쏟아내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풀 죽은 얼굴로 꽁하니 입을 닫아버린 내가 무색해졌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예쁘다. 하지만 보살피는 일은 힘들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망설이고 주저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육아가 기쁘지 않은 엄마는 틀려먹었다고 생각했다. 내재화된 규범으로 나를 단속했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네 새끼니까 힘들다는 소리 하는 거 아니라고' 꾸짖곤 했다. 이제는 엄마도 반복되는 보살핌 노동에 힘들고 지친다고 말할 수 있다.


일관된 양육이 올바르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오늘은 연극을 하면서 놀아주었지만 내일은 종알거리는 말소리 시끄러울 수도 있다. 어제는 함께 춤을 추며 어깨를 들썩였어도 오늘은 조용히 앉아서 퍼즐을 맞추고 싶을 수 있다. 이런 변덕스러운 감정을 숨기려고도 했다. 별 것 아닌 일로 아이들에게 과하게 화를 내고는 죄책감을 느꼈다. 아이에게 매달리지 않고 자기 삶을 사엄마가 되라 배웠으나 익숙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보살핌을 내맡기고 있다는 자책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가 아닌 나를 중심에 아야 했다. 코로나 시기에는 학교와 보육이 중단되어 돌봄과 엄마의 일상이 뒤섞였다. 이기적인 엄마를 실현하기에는 벗어던질 마음의 짐이 많았다. 보기에는 멋지고 근사했지만 실현불가능한 또 다른 이상향일 뿐이었다.  


늦게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큰 아이가 투덜거린다. 영어단어 테스트 결과로 선생님에게 혼이 난 모양이다. 어쭙잖게 충고라도 했다가는 큰일 날 분위기다. 귀만 열어놓았다. 막내가 냉장고 앞에서 울고 있다. 저녁 정리하 이제야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일 인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떨어진 것이다.  큰 아이가 먹는 속도를 막내가 따라잡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평정심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막무가내였던 아이는 누나가 먹던 것을 뺏어(누나는 무슨 죄란 말인가?) 물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일절 입에 대지도 않았던 종류였다. 입 주변에 초콜릿을 잔뜩 묻히고 흡족한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가 이거 먹을래?" 얘가 아주 사람을 잡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사진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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