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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Jun 21. 2022

병명은 메니에르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조금씩 컴퓨터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까부터 나른하더니만 졸린 건가 싶어 텀블러에 담아놓은 물을 입에 머금고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뜨니 주변사물이 전부 흔들렸다. 책상도, 바닥도, 벽도, 기둥도 흔들렸다.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팔걸이에 양손을 쥐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업무에 바쁜 직원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렇게 30여분 의자를 붙들고 앉아서 진땀을 뺐다. 약속된 미팅 시간이 되어 손님이 찾아왔다. 바닥을 응시한 채 몸이 안 좋다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그제야 옆에 있던 직원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세요?" 직원들 시선이 모여들었다. 놀라고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어지러워. 잠깐 그런 줄 알았는데 가라앉지를 않아, 왜 이러는 거지?"


세상이 빙글거려 눈을 뜰 수 없었다.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눈을 감고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이 증상이 별 것 아니기를 바랐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곁에 있겠다는 약속, 독립적인 엄마가 되겠다는 약속, 지킬 수 있겠지 애써 마음을 다독다. 남편의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더딘 걸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움켜잡은 남편의 손은 따뜻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석, 메니에르 증후군이다.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질병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비슷한 증상이 재발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암했다. 약은 증상을 완화시킬 뿐 치료제는 아니라고 했다.  병명은 낯설고 치료법도 막연했다. 얼마 전부터 귀에서 소리가 나고 높은 곳에 올라간 것처럼 먹먹한 증상이 있었다. 별것 아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전조 증상이었다.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틈틈이 운동하며 몸을 살핀다고 자신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의사는 무리하지 말고 스트레스받지 않아야 재발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의 고단함과 괴로움이 제거된 무진공 상태는 없다. 서툰 사랑의 결실들이 아옹다옹 살고 있는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치의 시간이 나를 집어삼키려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다. 인생이란 녀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을 두고 보지 못한다. 심술쟁이다.


삶이 점점 협소해진다는 생각에 원망스러웠다. 새로운 업무에 도전하며 팀장을 맡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질병이 생긴 것이 답답했다. 바로 잡은 이석이 언제 떨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언제 어지러워질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몸 상태에 따라 일상을 조율해야 했다. 일에 집중하려던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불만이 앞섰지만 툴툴거릴 것만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성급한 욕심과 서두름에 고삐를 쥘 수 있었다.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오만함도 바로 잡아주었다. 삶은 계획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흐르며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열심히 살았던 결과가 질병이라니 억울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내가 이렇게 되게 만든 방관자인 것 같았다. 아이를 재우고 새벽까지 일했고, 야근하고 돌아와서도 쉬지 못했고, 주말에는 늦잠을 잘 수 없었다. 밤새 열에 들떠 먹은 것을 게워내는 아이를 살피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먹이고 입히며 준비물을 챙기고 숙제를 도왔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코로나로 재택 하며 육아와 살림과 업무를 도맡았다. 충분히 휴식했다고 느낄 만큼 쉬지 못했다. 싸워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이 회피하는 동안 수많은 낮과 밤이 지나갔다.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려 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원망과 분노가 차올랐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고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고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한 날의 결과였다. 내게로 찾아온 질병의 이유가 모두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움직임은 자유롭지만 신속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급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빠르고 급하살았던 일상이 천천히 느리게 바뀌었다. 조금만 움직임이 넓어지면 뒤뚱거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지지할 것이 필요했다. 신경을 집중해도 발이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느리게 걸었다. 머리는 둔기로 얻어맞은 것 마냥 무겁고 멍했다.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듯이 들렸다. 크고 날카로운 소리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웅성거리듯이 들렸다. 귀 안에 무언가 꽉 차고 막혀있는 느낌이 계속됐다. 목소리가 졌다.


움직임이 느려지니 집에서 얼마나 부산스럽게 행동했는지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니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다. 쓸고 닦고 정리하고 치우기에 바빠 종종거리기만 했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과 집안일은 온전히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내게 남편의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없는 남편을 보니 가만히 있기가 불편했다. 마음 편하게 아플 수도 없다.


어지러움 증상이 가라앉고서 이석에 관련된 정보를 검색했다. 이석, 양성 돌발성 두위 변환성 현훈, 전정신경염, 메니에르병, 어지럼증 다양한 정보가 있었지만 내게 맞는 적합한 처방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리하지 않고 일상을 절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격하게 끊는 감정에 휩쓸려 돌겠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넋두리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세상이 돌더라도 내가 돌아서는 안되었다. 현기증 나는 세상 가운데서도 나를 중심에 두고 버텨야 했다. 내가 버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언제 갑자기 흔들릴지 모른다. 오늘은 어지럽지 않으니 그것으로 다행이다.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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