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귀는 내내 꽉 찬 느낌이고 코로나로 시작된 잔기침과 두통도 여전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몸에 무리가 갈까 행동이 조심스럽다. 성실하게 살아갈수록 선택지는 줄어들고 생활의 폭은 좁아져간다. 매일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질병이라는 사실을 원망한다.
아프다면 아픈 거지 어떻게 아프냐고 물어보는 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고 구구절절 말한다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현상은 다른 몸을 사는 너는 알 수가 없다. 질병의 고통에서 오는 괴로움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체험이다. 다른 객체인 너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누구도 도울 수 없는 고독의 순간을 지나며 너를 미워하려다가 슬퍼졌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나는 친구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친구를 원하지만 만들지 못했다. 내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 주는 타인을 원하지만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모르겠다. 마음의 밑바탕에는 좋은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갈증이 있다. 혼자여도 충분하다고 불필요한 인간관계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이다. 관계에 대한 욕구는 쉽게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의 호의에 선선하게 반응하는 사람에게 금방 마음을 빼앗겼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의심하지만 막상 누군가 다가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냉큼 받아들였다.
네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지에 신경을 집중했다. 너에게 쏠린 관심은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질주했다. 그때부터는 내 감정에 몰입되어서 상대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질과 시간을 성급하게 콸콸 쏟아부었다. 열중하는 마음에 비례하여 타인에 대한 기준과 기대치도 높았다. 너에게 준 마음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상대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돌려받기를 원했던 마음은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었다가 절망과 체념으로 굳어졌다. 나를 좋아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결말도 정해놓았다.
사람을 좀체 믿지 못했다. 세상 너그럽고 이해심 넘치는 좋은 얼굴을 하곤 웃지만 사회성 가면이다.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웃음을 걸치고 냉소를 둘러썼다. 실제로는 타인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상대의 말과 행동의 진심을 의심했다. 나를 향해 웃는 표정과 호의와 친절을 전부 의심했다. 겉으로는 내게 그럴 리가 없을 거라며 믿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가짜일 거라고 여겼다. 뒤돌아서 나를 비웃을 것을 상상하기도 했다. 끝없이 의심하고 빗장을 거두지 않았다. 상대의 호의에 넘어가면 안 된다며 마음을 닫아걸었다. 내 기대와 희망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 두려워 성급하게 방어하는 것이 익숙했다. 상처받는 것이 싫어서 미리부터 회피하려고 들었다. 나를 알게 되면 실망하고 싫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상대의 마음을 믿지 못했다. 감정표현을 숨기고 피하며 상대방의 눈치를 탐색하다 보니 긴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쉽게 피곤해졌다.
거절과 비난에 취약했다. 내가 좋아하며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받는 날 선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족과 가까운 사람의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를 못했다. 그들이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상처받고는 혼자 울기도 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되갚아 주겠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덤벼들기도 했다.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타인이 낯설어진다 느끼면 겁을 먹고 쪼그라든 공벌레처럼 혼자 만의 세계로 틀어박혔다. '지금보다 더 힘든 일이 생길지도 몰라. 나한테는 무리일지도 몰라 여기서 그만두는 건 어때.' 알고 보니 역시나 이 사람도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속단했다. 작은 소리에도 크게 놀라 도망치는 고라니처럼 겁먹고 움츠러들었다. '내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이런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봐야 믿어 주지 않을 게 뻔해. 소용없어.' ' 괜히 얘기했다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지도 몰라? 미움받을 거야. 별 이상스럽기도 하다고 손가락질할 거야' 꼭꼭 눌러둔 불안이 터져 나올까 미리 은신하듯 숨어 사람을 피했다. 어딘가 속하고 싶어 하면서도 벗어나려는 이중적인 마음을 숨기려고 애썼다.
다정하고 세심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처가 두려워서 친밀함을 거부했다. 엄마는 야박했고 남편은 차가웠다. 물러서지 못한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에 노출되었다. 다가갈수록 함부로 대하는 그들에게 질려갔다. 환대받지 못한 경험은 고스란히 내면에 쌓여갔다.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 속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이 두려워 맞서지 못하고 참기만 했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방어하느라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럴 수도 있는 사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운 사이라서 가족이라서 함부로 대하며 해를 끼쳐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탓했고 나는 그들이 무례하다고 여겼다.
이제 나에게 질문해 본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다정한 사람, 괜찮은 사람, 멋진 사람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만든 가짜였다. 나를 꾸미려 애쓰는 일에서 벗어나 내 모습을 있는 대로 수용하는 경험이 필요했다. 타인에게 향했던 궁금함과 호기심을 나에게로 돌려본다. 착한 사람이 되기 전에 나에게 착해지기로 했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전에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 마음과 행동과 생각들을 탐색하고 기록한다. 숨 쉬듯 가까워서 소홀하게만 대했던 나를 자세히 보고 아끼기로 했다. 판단하기 전에 내 현상을 관찰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게는 꼬깃꼬깃 접어놓은 이야기와 눌러버린 감정들이 쌓여 있다. 그렇게 뭉쳐져 있는 나를 천천히 꺼내고 살펴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쉽게 단정하지 않겠다. 간단히 설명하지 않겠다. 내가 존중하고 대접한다면 누가 나를 무시할 수 있을까? 유일하고 특색 있는 존재를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 자기 불확신에서 벗어나 자기 의문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에서 벗어나 관찰하고 관심사를 추적하면서 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야겠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야 겠다.
<사진출처: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