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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Aug 23. 2022

울부짖던 얼굴

아이는 생후 3년 동안 주양육자와의 애착이 충분히 형성되어야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일하는 엄마를 둔 탓에 생애초기 애착을 채우지 못할까 두려웠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자주 울고 떨어지지 않으려 보채면  잘못 양육하고 있다고 염려했다. 아이에게 잠재된 가능성을 놓칠까, 소중한 순간을 후회하게 될까, 그 모든 일의 원인이 일하는 엄마 때문일까 노심초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지나치다 싶지만 그때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막내는 인생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세 아이들의 순정한 해맑음은 나의 빈약한 자아를 투명하게 비춰 주었다. 막내의 출산으로 시작된 두 번째 육아휴직에서 내가 얼마나 자주 별 볼 일 없고 비겁하고 쪼잔하고 치졸한 인간인지를 깨달았. 모나고 부족한 내 모습을 직면하고 인정하게 만든 것이 육아였다.


사랑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나는 여러모로 곤란했다. 자주 주저앉고 휘청거렸다. 밑바닥에 깔려있는 우울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 우는 아이를 달래야 했고 두 아이의 끼니를 챙겨야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면서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보살피일이 나를 노예로 길들였다. 열에 들떠서 뒤척이는 아이 달래 이마를 매만지고 숨결을 확인했다. 자는 동안에도 가만있지 않는 아이의 움직임에 몸을 추면서 잠들었다. 입에 맞는 크기로 음식을 자르고 나누며 밥을 먹었다. 쌕쌕 대는 아이의 숨소리를 따라 작은 얼굴에 고개를 대고 까무룩 잠을 잤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무한한 애정이 무자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도 사그라들지 않는 아이들의 에너지가 야속하다 싶을 때가 있다. 아이에게 홀딱 빠져서는 천상을 떠도는 기분에 사로잡히다가도 귀찮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아이들을 향한 극단적인 감정은 엄마에게 느낀 양가감정과 닮아 있었다. 현실에는 절대적 순도의 사랑이 없고 모성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라도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것을 알았다. 사랑의 순수함을 믿지 지만 아이들 마음은 의심할 수 없었다. 진지하고 말간 눈빛에서 다른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막내가 백일을 넘기고 뒤집기를 하던 즈음 오후였다. 자고 깨는 것이 어색해서 얕게 자며 칭얼대는 막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잠이 오는 느낌이 싫어서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쏟아내는 막내를 달래서 간신히 재웠다. 뒤돌아 선 나는 옆방 문을 걸어 잠고 못나고 험한 말을 내뱉으며 손에 잡히는 물건을 거칠게 집어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미친 사람처럼 격렬하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을 나서는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제인 에어 속 다락방에 갇혀 울부짖던 미친 여자가 떠올랐다. 찰랑거리던 활기와 명랑함은 사라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고 황량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충실, 헌신, 책임 그것이 가능할까? 정말 무결하게 내어주는 마음이 있을까?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을까? 불안정하고 곤혹스러운 내가 그들의 마음을 품어줄 여력이 있을까? 


엄마는 아이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는 보호자다. 엄마는 분주하다. 아이들의 상황과 시기에 맞게 적절하고 적확하게 행동해야 한다. 아이들의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게 챙겨줘야 한다. 예측 없는 질병에 당황하고 애태우지 않을 담력은 기본이다. 웃다가 울다가 성내다가 짜증 내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수용하되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매일 일어나는 소소하고 자잘한 사건들도 넉넉한 마음으로 들어주어야 한다. 눈이 감기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더라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아이들을 수용해야 한다. 온전한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기나긴 여정에 엄마의 세심한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사회생활과 다를 게 없었다. 나를 앞세우지 않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퇴근을 했어도 집으로 출근한 듯 소모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런 의무감 때문이었다.


아이의 존재가 확장되는 만큼 엄마라는 개인의 세계는 좁아졌다. 축소된 세계에서 육아하는 엄마의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글을 읽고 쓰는 짧은 사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것이었다. 손과 발이 되어주는 엄마는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전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꼼짝없이 붙들렸다. 반복되는 가사는 잠깐의 쾌적함을 주었지만 하찮은 존재가 되는 기분이 들게 했다. 먹은 그릇은 말끔해졌건만 감정은 쉬이 말끔해지지가 않았다. 그것을 붙들고 있다가 글을 쓰고 읽었다. 그것만이 아이들에게 빼앗긴 세계를 되찾는 방법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놓아주는 짧은 시간에 읽고 쓰는 일에 매달렸다. 방 한 편의 작은 책상은 자기 경멸과 증오에 휩싸인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내 시간은 한정 없이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다급하게 적는 모든 문장과 글자들은 나를 위한 발버둥이었다. 습관처럼 내재화한 모성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일으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듯 글을 썼다. 


<사진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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