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났다.
방금 전까지 내 몸을 조여오던 죽을 듯한 고통은 사라지고 쪼글쪼글 작은 핏덩이가 배 위에서 숨 쉬고 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마냥 설레고 벅찬 순간이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채우고 나를 지배했다. 쪽잠을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아이에게 매달리는 날이 이어졌다. 손발이 오그라들게 예쁜 순간은 찰나였다. 아이의 우렁찬 울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아이를 낳았지만 엄마는 되지 못한 상태였다. 수시로 울어대는 낯선 생명체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했다. 도움이 필요했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다. 위태롭고 위기에 몰렸던 때였다. 무작정 떠오른 건 엄마였다. 처음에 나를 세상으로 이어준 엄마... 퇴행하듯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엄마는 없었다. 그녀에게 나는 출가외인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나보다 더 낯설어했다. 당신의 늙어버린 몸을 살피고 돌보는 일이 먼저였다. 내 몸과 아이는 내가 살펴야 했다. 이유 없는 서러움과 분노가 차올랐지만 그 감정 또한 살필 겨를이 없었다. 당장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 그녀는 아이의 배냇짓에 기뻐했지만 울음소리에는 고개를 돌렸다. 노쇠한 어미를 탓할 수는 없었지만 섭섭하고 외로운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엄마는 당신에게 기대지 말라고 했다. 당신은 이제 늙고 힘이 드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엄마가 떠올라 선물을 건네고 함께 여행을 가려해도 내켜하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다는 엄마를 헤아려 보려 했지만 나를 내치는 그녀의 매정함에 마음이 상했다.
엄마는 다가서는 나를 자꾸 밀어내면서도 습관적으로 말끝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나를 돕는 것이 당신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했다. 약속하듯 건넨 그 말은 나를 달아오르게 했다. 목마른 대지에 뿌려진 단비 같은 그 말은 나를 꿈꾸게 했다. 엄마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엄마에게 의지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는 듯 이내 무관심해졌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며 그녀의 약속을 의심하게 되었다. 괜히 흔들리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사랑의 말을 듣고도 부정해야 하는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위선과 허위에 젖은 채로 상투적인 말을 내뱉는 그녀를 저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저주하는 나를 경멸했다.
철없는 투정이라고 자책했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았고 워킹맘인 내 삶은 점점 더 분주해져 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밭메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서 그녀의 회피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댈 곳을 잃은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철없는 불효라는 자책과 함께 분노를 쌓아 올렸다. 마음에 분노를 품고 좋은 엄마라는 역할에 몰입했다.
2018년생인 막내가 세 살이 된 2020년도 초반부터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채롭던 일상이 점점 단조로워졌다. 코로나 감염병으로 학교와 보육시설의 방역 기준은 엄격했다. 갑작스럽게 급식도 없이 하교하는 일도 일과 중에 급히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도 자주 생겼다. 어려운 일이었다. 가정에서만 해야 하는 돌봄도 시작되었다. 초등 5학년, 2학년 두 남매는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었고, 막내는 어린이집 개원 연기가 계속되었다. 노트북 로그인에서부터 원격수업 사이트 접속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했다. 하나씩 더듬더듬 서툴게 시작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업결손을 막으려 늘어난 과제로 챙기고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았다. 엄마나 아이나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아빠와 엄마가 집과 직장을 오가며 아이 돌봄과 일을 병행했다. 재택근무로 숨통이 틔였지만 코로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정보육도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피로가 쌓여갔다. 일을 하다가 막내와 놀아주다가 두 남매의 원격수업을 살피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일과 보육이 내게로 몰리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버겁다 느낄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일정을 조율하면서 고단함과 짜증을 공유했다. 부모도 아이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해 생소한 일상이었다. 놀이 챌린지도 하고 신나는 음악에 몸을 흔들어 보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서 하루하루를 버티어 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지만 현실은 엄마 혼자 종종거렸다. 몸도 마음도 힘들고 지치는 시기였다. 엄마 '갑자기 아이들이 혼자 있게 되었는데 잠시 함께 있어주면 안 될까? 어린이집이 갑자기 휴원을 하게 됐어. 하루만 집에 다녀갈래?'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그 말이 턱끝에 걸려있었지만 차갑게 거절당하고 상처받는 것이 싫어서 말하지 못했다.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기댈 수 없다는 현실이 쓸쓸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끝도 없는 죄책감에 소모되고 싶지 않았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잡으려 애썼다.
여자의 성공은 친정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고생을 원하는 자녀는 없다. 자식의 자녀양육이 조부모의 의무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린 자녀의 보육문제로 갈등하다가, 육아로 일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갈등하다가, 늙은 어미를 찾게 되는 것뿐이다. 애를 봐준 공로는 없다는 엄마의 넋두리 앞에서 어찌할 바 몰랐다. 첫째 아이를 세 돌까지 돌봐준 엄마였다. 그녀에게 나는 자식 욕심(삼 남매!)이 과한 철부지였다. 아이들이 잔병치례를 할 때도 학원을 오가는 경로를 바꿀 때도 꾸중을 듣는 일이 많았다. 애를 맡기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고개 들지 못했다. 그녀가 아플 때면 마음이 더욱 무겁고 불편했다. 육아를 둘러싸고 어린 엄마와 늙은 어미가 신경전을 벌였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음먹었던 육아 독립을 실행했다. 남매의 생활공간이 필요했고 막내의 짐도 늘어났다. 코로나 원격수업과 가정보육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친정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 삼 남매는 손발을 맞추며 조금 더 양보하고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벌써 1년이 되었다. "오늘은 하루쯤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속삭이며 타협하려는 때도 있다. 삼 남매 육아 독립이 쉽지는 않다. 수동적인 남편과 방향이 꼬이고 오해가 쌓이고 짜증이 넘쳐 싸우는 날도 많았다. 이 또한 독립을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믿는다.
<사진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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