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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Nov 11. 2024

막내 작가 버텨내기

   ‘쪼다병’에 걸린 채 하루하루 근근이 버텨내는 날의 연속이었다. 돌이켜 봤을 때 내가 억울할 정도로 일을 잘했나라고 객관적으로 따져본다면 백 프로 잘하는 막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선배의 입장이 된 지금 그 시절 선배들의 입장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고 한들 그때의 선배들의 행동들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직장 내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좌절감과 모멸감을 느끼고 이런 취급을 받으며 나는 왜 그만두지 않았나?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만두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프로그램을 말했을 때 나를 알아주고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본방송은 물론 재방송까지도 챙겨보는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으니 주변에서도 난리였다.      


  친구들은 나를 이름이나 별명보다 ‘장작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내 친구가 1박 2일 작가’라며 자랑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학창 시절 별 볼일 없던 내가 가족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그 기대를 실망으로 돌려주고 싶지 않았었다. 엄마는 친척들에게는 물론 마트에 장 보러 갔다가도 아들이 1박 2일 작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였다.      


  이 당시 누나와 둘이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가장 가까이 지내는 누나에게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꺼내놓고는 했다. 누나는 3개월만 참아보라고 했고 3개월 뒤에는 6개월까지만 버텨보라고 6개월 뒤에는 1년은 채우고 나와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달랬었다. 당장 내가 차도에 뛰어들어 죽고 싶은데 내 주변에서는 내가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 채 자랑거리로서 추대하고 있으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주변의 기대에 떠밀려 출근을 하면 힘든 시간만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내가 유일하게 숨통을 트고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행팀이었다.     


  촬영을 할 때는 여러 전문 스태프들이 모인다. 카메라, 조명, 오디오, 지미집 등의 기술 전문 스태프들이 있고 전체 촬영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진행팀이 있다. 진행팀은 보통 진행팀 회사에서 정직원 2~3명에 나머지 아르바이트를 뽑아서 보내주는데 1박 2일의 경우에는 프로그램 특성상 아르바이트로 오는 친구들도 고정으로 나오는 친구들로 보내주었었다. 그래서 매번 촬영할 때마다 아는 얼굴들이 나오고 나이 때도 20대 초, 중반이 대부분이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보통 진행팀과는 막내작가가 거의 소통을 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들과 가까이서 이야기를 했고 특히나 소품을 챙기는 일들을 함께 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촬영준비를 하다가 진행팀들이 모여있는 소품실로 내려갈 때면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금세 친해진 진행팀들과는 소품을 챙기면서 농담도 주고받으며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1박 2일 특성상 소품이 상상 이상으로 많고 또 다양하기 때문에 진행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했고 믿음직한 진행팀 덕분에 나도 그들에게 기댈 수 있었다.      


  촬영을 갈 때면 스태프 숙소를 내가 직접 배정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진행팀들과 한 숙소에 배정을 했었다. 진행팀 숙소는 항상 10여 명이 한 번에 묶을 수 있는 마을회관이나 가장 큰 방으로 잡았었는데 첫날 촬영이 끝날 때쯤이면 먼저 들어가는 인원들이 밥차에서 남은 반찬들을 포장해서 근처 마트를 들러 술을 사가지고 들어갔었다. 나머지 인원들도 숙소에 들어오면 남은 반찬들을 안주로 술 한두 잔을 주고받으면서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데 이때의 기억이 지금도 행복했던 한 순간으로 잊히지 않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남자들 10여 명을 가장 큰 방 하나에 몰아넣고 침구류가 온전치 않은 마을회관으로 숙소를 잡아주고 했던 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한 방에 다 같이 자면서 쌓은 정이 만만치 않았다. 한 여름에는 마을회관 앞 수돗가에서 다 같이 웃통을 벗고 등목을 하고 회관에 노래방 기계가 있으면 노래도 한 소절 씩 부르면서 놀기도 했었다.      


  이때의 인연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여전히 그들을 보면 가장 마음이 편하고 기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고는 한다. 진행팀은 가장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가장 마지막까지 고생해 주는 친구들이었다. 방송계에서 이들은 여전히 대접을 못 받고 일을 하지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스태프 중 하나이다.      

  이들은 나의 가장 힘들었던 막내 생활을 지탱해 준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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