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잃은 채 죽은 듯이 살아가며 프로그램에서 버텨온 지 약 10개월 즈음되었을 무렵이었다. 어느새 계절은 한겨울이 되었고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었고 연차도 1년을 더 먹었지만 내 생활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고 특별한 진전도 없이 그저 반복되는 또 다른 하루가 되었을 뿐이었다.
봄을 기다리면서 매섭던 추위도 한풀 꺾이던 어느 날이었다. 이번주에는 또 어떤 촬영을 할지 촬영 콘셉트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장소 회의를 진행하던 중 메인 작가 선배와 메인 피디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회의실에서 자리를 비웠다. 회의 테이블의 수장 두 명이 모두 자리를 비웠으니 회의는 올스톱이 되었고 다들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을 때웠고 나는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 없이 새로운 장소들을 찾고 있었다.
잠시 후 세컨드 작가 선배가 콜을 받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얼마 뒤에 회의실로 돌아와서는 그다음 작가가 자리를 비웠다. 이후 한 사람씩 교대로 회의실을 나가기 시작하는데 들어와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나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순서대로 불려 나간다면 나는 마지막 차례일 것이다.
내 앞에 선배가 나갔다가 들어온 후 나에게도 다른 회의실로 가보라는 말을 전했다. 나는 콜을 받은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자리에는 메인 작가 선배가 혼자 앉아있었다. 불길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나에게 선배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촬영부터 메인 PD가 교체가 된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건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려주지도 않았고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진들도 프로그램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에 대해서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상황을 처음 겪은 나는 당연히 선배들의 거취가 궁금했지만 온전히 개인의 판단으로만 선택하기를 바란다는 이유로 개별적인 면담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매일 죽고 싶고 그만두고 싶었던 프로그램인데 막상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보잘것없는 프로그램 감투가 아쉽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서 선배들이 면담을 다녀왔을 때의 분위기로 보아 전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떠날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에 결국 프로그램에 남아있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야기를 들은 메인선배는 사실 본인도 내가 남아있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메인 선배를 포함한 작가들 전체가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아무도 이 프로그램에 남아있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 프로그램의 시스템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새로 오는 작가들에게 예의가 아니다는 이유였다. 적어도 전체 시스템을 파악하고 있는 막내 작가 정도는 남아있기를 은근히 바랐었다고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새로운 작가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정을 붙이고 유대를 쌓아가는 과정은 분명 피곤한 일이었으나 이전 선배들로부터 받았던 나아질 수 없는 압박감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작가진들의 거취가 모두 결정이 되었고 아직 마지막 촬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나는 새롭게 교체된 PD와 이미 새롭게 꾸려진 작가팀들에게 호출을 받아 다른 사무실에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사자들만 몰랐고 이미 새로운 PD와 새로운 작가진들은 진작부터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그저 당사자들에게만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마지막 촬영 준비는 현재팀의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또 동시에 새롭게 출발하는 팀과 첫 촬영회의를 오가며 정신없이 진행해야만 했다. 제주도에서 진행한 마지막 촬영은 떠나는 PD와 작가들의 마지막 추억여행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들 추억사진 남기기에 바빴고 그 사이에 나는 끼지 못했다. 마지막이 아니었어도 내가 그 사이에 껴들 일은 없었겠지만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마지막 촬영을 끝으로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만들어준 선배들이 떠나고 새로운 작가팀이 합류를 했다. 내 작가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 중 또 한 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