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액젓 사건이 선배들의 배려로 좋게 마무리가 된 후 한동안은 큰 사건 없이 무난하게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몇 년을 똑같이 만들어왔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레귤러 하게 자리 잡은 스케줄은 큰 변동이 없었고 다만 업무량이 많아서 조금 버거워서 내 시간이 없다는 것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마음 편히 이 팀에 완벽하게 적응했던 것도 아니었다. 수습은 잘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전례 없는 큰 사고를 친 것은 변함이 없는 일이었고 당연스레 선배들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혼자 눈칫밥을 먹던 중인 것이다.
이맘때 1박 2일에서는 나름 대기획을 준비 중이었다. 재외동포들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함께 여행을 하는 특집을 기획하고 있었고 수많은 신청자들 중에서 최종으로 합격자를 추려내고 한국으로 초대해서 출연자들과 짝을 이뤄 국내 여행지를 함께 여행하는 구성이었고 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기 때문에 여행지 또한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많은 여행지들 중에서 선택된 곳이 안동이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조금은 뻔한 한국 여행지였지만 가장 직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실 그 당시 막내인 내가 무슨 생각이 있었겠나, 그저 선배들이 회의하면서 정하는 여행지를 자료조사를 했을 뿐이었다. 안동에 이어서 추가적으로 한 장소가 더 정해졌는데 바로 독도였다.
안동 한옥 마을에 이어 독도까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아주 직관적이고 명확한 콘셉트였다. 심지어 독도에는 배를 타고 들어갈 때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보이는 구간이 있었는데 이때 출연자들에게 한반도 지도를 만들어서 나눠주는 구성까지 추가가 되었다. 나는 회의에 맞춰서 한반도 지도를 소품 제작 의뢰를 했고 그냥 종이에 주는 것은 너무 없어 보이니까 고지도 느낌으로 화선지에 만들어 주기로 했다.
촬영 전날 종일 촬영 준비를 하고 늦은 밤에 재외동포들이 도착을 했다. 각자 KBS 인근에 호텔을 잡아주고 마지막으로 소품체크를 하고 대본을 만들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KBS 본관 계단 앞에서 오프닝을 하고 안동을 향했다. 그리고 촬영은 큰 문제없이 잘 진행되었고 몸은 피곤했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출연자들이 모두 베이스캠프에 들어와서 저녁복불복, 잠자리 복불복까지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2일 차 촬영 준비를 위해 소품차에 올랐다. 안동에서 독도를 가려면 동해까지 이동 후에 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아주 이른 새벽에 출발해야 했고 잠잘 시간도 없이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기본적인 소품인 1박 2일 로고 깃발, 현수막 등을 챙기고 가장 메인 소품이었던 지도를 찾는데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큰일 났다, 지도가 없다.
소품차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있겠지 라는 희망을 품고 소품차의 소품을 전부 들어내고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지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아직 사무실에 남아있을 다른 팀 작가들에게 연락해서 사무실을 봐달라고 했는데 그 소품이 우리 팀이 아닌 다른 팀 캐비닛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서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퀵서비스 회사에 전화를 해봤지만 밤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서울에서부터 안동까지 퀵을 해줄 수 있는 회사는 없었다.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서울에 있는 지도를 안동까지 가져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 사실을 선배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도 그때의 공포와 떨림을 잊을 수 없다. 당장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상황만 악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무서움을 견디면서 선배를 찾아가 소품이 누락되었음을 이실직고했다. 선배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확 구겨졌고 아주 잠시였지만 나에 대한 경멸의 눈빛까지 읽어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고 이메일에 보관되어 있던 이미지 파일로 급하게 근처에서 일반 A4용지에 프린트를 했다.
촬영은 별문제 없이 마무리가 되었고 세컨드 작가 선배가 나를 따로 불러내서 마찬가지로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다음 회의 전까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을 전했다.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견딜 수 없는 굴욕감이 찾아왔다.
이미 1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당시의 상황들과 내 감정들이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회의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