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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Oct 19. 2023

뜨개에는 계절이 없다. - 코바늘 뜨개 모음

올 여름은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왔는데도 더웠다. 태풍이 지나고 잠시 사그라들었던 더위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그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덥고 모기도 많았다. 내가 사는 지역은 그주 한낮 최고기온이 30도까지 올랐는데, 덥다고 일부러 말하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다. 이제 여름의 끝이 처서가 아닌 게 확실하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몸에 열이 많기도 하고, 축축한 장마철과 꼬박꼬박 발라야 하는 선크림에 거부감이 든다. 모기를 포함한 날벌레와 쉽게 상하는 음식들까지 이유도 많다. 그렇다고 싫지도 않다. 잘 익은 수박을 긁어내 얼음 띄워 먹는 화채는 얼마나 맛있고, 복날마다 챙겨 먹는 삼계탕이며 닭죽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 게다가 여름이 막 지났을 때 시원해지기 시작하면 다음 여름까지 1년이나 남았다는 뜻인걸.


나머지 계절에도 각자 선호의 이유와 기피의 이유가 있다. 뜨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세상 모든 걸 뜨고 싶어하던 때에는 계절의 흐름을 실로 구분하곤 했었다. 한여름에는 어쩔 수 없이 뜨개질이 느슨해졌고, 에어컨의 힘으로도 손에 차오르는 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린넨이나 면 튜브사 같은 시원한 실을 써봤다. 정말 찬 기운이 감도는 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이러면 정말 일 년 내내 뜨개를 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었지.


뭐, 실이 아무리 좋아도 더위와 계절을 핑계 삼아 잠시 쉬는 날도 있었다. 봄에는 날이 좋아 바깥 활동이 많아져서, 가을에는 여름 동안 미뤄놓은 친구들과의 약속을 나가느라, 겨울에는 너무 추워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어서. 계절마다 뜨개를 미루는 핑계가 있다. 그럴 때는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것들을 주로 뜬다.      


1. 여름을 기다리며 과일을

봄에는 여름을 기다리며 과일 파우치를 만들었다. 기본 원형뜨기에 색만 바꾸면 복숭아부터 사과, 망고까지 커버 가능한 만능 파우치다. 여름에 먹는 과일은 유난히 맛있다. 객관적으로 당도가 높은 과일이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푹푹 찌는 공기를 뚫고 집에 들어와 한입 베어 무는 과일은 참 달다. (사실 다른 계절에는 과일을 잘 먹지 않아 얼마나 단지 모른다.)

점점 짧아지고 있는 봄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벚꽃 나들이 때 입으려고 산 새 옷을 두 번 정도 입은 뒤, 일찍 더워진 날씨 탓에 내년 봄을 기약하며 장롱에 다시 넣어두는 일 정도다. 어릴 때는 벚꽃을 보러 가며 얇은 외투를 챙기는 게 당연했는데 작년에는 고작 긴 소매 옷 한 겹만 입고도 땀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봄은 지나갔다. 슬퍼하지 말고 함께 과일을 만들자.     


2. 가을을 기다리며 체크를

여름에는 가을을 기다리며 체크를 만든다. 간단한 배색으로 굉장히 그럴듯해 보이는 체크를 완성할 수 있다. 가을을 떠올리면 여름 더위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추위를 안 타는 체질이라 남들보다 가을을 길게 즐기는 편인데, 적어도 내게는 12월 중순까지 가을이다. 

미적 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내가 가장 선호하는 무늬가 바로 체크다. 깅엄, 글렌, 타탄, 아가일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한다. 덕분에 내 셔츠와 카디건은 거의 모두 체크 무늬다. 꼭 나중엔 체크 무늬가 가득 들어간 스웨터를 짜 봐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두 손 배색에서 언제나 포기한다. 대체 양손으로 슥슥 배색하는 분들은 어떻게 하시는 건지. 인터넷에서 방법을 찾아봐도 한 손을 신경 쓰면 한 손에 힘이 덜 들어가 실이 느슨해져 무늬가 예쁘지 않다. 진짜 언젠간 뜨고 말겠다.     


3. 겨울을 기다리며 트리를

가을에는 겨울을 기다리며 트리를 뜬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도 연말 분위기에 설레는 사람이라 집에서 혼자 트리나 리스를 만들며 두근댄다. 

예전에는 예수 생일이 뭐라고 그렇게 호들갑인가, 했던 시절도 있었다. (기독교 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세상을 비관적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연말이 지나면 연초가 오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회적 책임과 몫이 커질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고, 책임을 다하면 권리가 보장된다는 걸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과 간질거리는 데이트도 경험하면서 크리스마스는 중요한 날이 되었다. 


사람은 참 아는 만큼 보고, 경험해본 만큼 생각한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 지금 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상황과 이유로 행동하고 있을 테니까. 


자,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얼 해볼까.     


4. 다시 봄을 기다리며 꽃을

겨울에는 다시 봄을 기다리며 꽃을 뜬다. 시들지 않는 꽃을 떠 유리컵에 꽂아두면 그 순간만큼은 봄이다. 봄이 짧아질수록 여름이 빠르게 다가오기 때문에 겨울부터 봄을 즐길 계획을 짜야 한다. 더워지면 밖에서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체력이 닳는다. 100에서 50으로 줄면 그곳이 어디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길바닥에서 체력이 바닥나면 그대로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토록 싫어하는 여름이 올 줄 알면서도 봄을 기다리고, 여름에는 다시 가을과 겨울을 기다리고.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이가 든다. 딱히 뜨개를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지만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조용하고, 폭닥대며, 꼼지락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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