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뜨개옷은 조끼였다. 소매를 안 떠도 되니 빨리 완성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도한 거였다. 늘 시작은 쉽다. 시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누구보다 빠르다. 이사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이틀 뒤에 이삿짐 센터를 부르는 아빠를 둔 덕분에 실행력 하나는 나쁘지 않다. 끝까지 해내는 법도 물려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까지 배우진 못해 늘 시작만 한다.
시작이 반이라던 속담은 틀렸다. 시작이 반이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내 경우에는 수틀리면 그만두는 못된 습관을 가졌기 때문에 시작은 그냥 시작일 뿐이었다. 정직하게 반을 해야 반인 거다.
뜨개도 그랬다. 작은 소품이나 목도리 같은 것만 뜨다가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바로 시작했다. 처음 떠보는 주제에 따지는 건 또 많았다. 둥근 얼굴형이라 목을 덮으면 답답해 보이니까 V넥으로, 청바지와 입을 거니까 잘 어울리는 시리얼 색으로. 그렇게 나는 겁도 없이 바텀-업에 도전했다.
바텀-업은 말 그대로 아래서 위로 뜨는 방식이다. 허리 밑단에서 시작해 가슴 부분까지 원통으로 뜨고, 팔이 들어갈 자리가 되면 원통으로 뜨던 코를 반으로 나눠 앞과 뒤를 따로 떠준다. 그대로 어깨까지 뜬 후 앞과 뒤를 이어주면 된다. 자,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하면 ‘길이 조절 불가’다.
위에서 시작해 밑으로 내려오는 방식이라면 중간중간 입어보면서 더 뜰지 말지 고민할 수 있다. 분명 얼마만큼 떠야 할지 미리 생각해 놓지만 막상 입어보면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총 기장은 늘 달라진다.
그런데 밑부터 시작했다면? 중간에 입어볼 수도 없고 팔 구멍을 위해 앞뒤를 나눈 시점부터 길이 조절은 불가능하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원통으로 이어진 부분이 나올 때까지 푸는 수밖에.
이게 내 첫 뜨개옷이다. 뜰 때는 코가 삐뚤빼뚤 했지만 세탁의 힘으로 가지런해졌다. 중고 거래로 샀던 실이라 정보는 없지만 까슬거리는 걸 봤을 땐 아크릴 함량이 높은 실인 것 같다. 게이지 내는 법도 몰랐고 사이즈를 어떻게 재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유튜브만 따라 하다가 망했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었다.
당연하다. 바늘 굵기부터 실, 장력까지 모든 게 다른데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한다고 해서 잘 될 리가 없다. 가슴둘레는 작아서 터지기 직전이었고 팔 구멍은 또 너무 늘어져서 겨드랑이가 시원했다. 그 와중에 목은 한참 파여서 곤란했다. 뜨개질에 계산이 필요하다는 걸 이때 알았다. 특히나 바텀-업이라면 더더욱.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뜨개도 위로 올라가는 게 힘들다. ‘위’라고 말할 만큼 높이 올라가 본 적도 없지만 상하의 기준이 감정이라면 나는 늘 행복에서 좌절로 가는 지름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감정선이라는 게 눈앞에 실재한다고 치자. 그럼 나는 보호 그물망 없는 외줄타기를 한다. 어떻게 줄을 밟고 섰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근데 줄에 올라있는 동안은 마냥 좋다. 내가 얼마나 흔들리는 존재인지도 모르고 그냥 즐겁다. 그러다 아주 약한 바람이라도 불면 두 다리가 덜덜댄다. 얼마 못 가 떨어지고, 우울하다. 나는 이 줄조차 끝까지 건너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실직이나 이별, 낙선과 같은 바람이 내겐 너무 힘겨웠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다고 큰소리친 것과 달리 내 마음에서는 시시각각 외줄을 만들어냈다. 글을 쓰며, 사랑을 하며 줄에 아등바등 올라가 행복을 만끽해도 혼자 있는 동안은 수많은 바람에 추워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예전에는 밝고 건강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애초에 걱정 없이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겨낼까. 이런 바람이 내게만 부는 건 아닐 텐데, 다들 어떻게 어리광부리지 않고 어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런 효용성 없는 고민을 끊임없이 하며 또 자책한다.
뜨개질 얘기를 하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얘기인가 싶겠지만 이런 고민이 내가 뜨개를 멈추지 않는 이유다. 실패하더라도 더디더라도 어쨌든 끝에는 결과물이 나오는 정직한 뜨개질을 나는 사랑한다. 첫 조끼를 뜨던 날에도 분명 정체 모를 바람이 날 스치고 있었을 거다. 내가 살아가야 할 방식과 방향에 대한 고민이었을 확률이 크다. 지금은 떠올리려고 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이미 해결되었거나 그리 중한 고민이 아니었을 테지. 나이는 들어가는데 왜 나는 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는지. 제법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데도 조금만 변수가 생기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어떤 고민은 실과 바늘에 함께 엮여 옷이 된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 손으로 조물거리며 세탁까지 하고 나면 가지런히 정렬된 코만큼이나 고민도 가지런해진다. 그리곤 볕 좋은 베란다에 눕혀 놓으면 조금 남아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물기와 함께 마른다. 향이 좋은 울샴푸 덕분에 옷이 마르면서 라벤더 냄새가 은은히 주변에 맴돈다. 그럼 나는 바짝 마른, 라벤더 향이 나는, 포근한 옷을 입고 나간다. 세탁과 착용을 반복하면 어느새 고민 같은 게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첫 조끼를 뜨며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완성한 옷에 관해 얘기하자니 꼬리가 길어졌다. 사념을 쓰자고 시작한 글이지만 감정만 쏟아낸 글은 좋은 글이 아닌데. 오늘도 걱정거리가 늘어버렸다. 뜨개질을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