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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Oct 17. 2023

할머니는 나를 닌자로 키웠다. - 조끼 가디건

처치 곤란한 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여러 색이 섞여 있는 옴브레 얀 두 볼. 할인에 이성을 잃어 일단 사둔 실인데 색이 지나치게 형광이라 1년이 넘도록 서랍에만 박혀있는 실이다. 요즘 가지고 있는 실을 처리하는 중이라 이 옴브레 얀도 어떻게든 처리를 하려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분홍색, 주황색, 자주색이 이어지는 쨍한 –다소 촌스러운- 색과 400g이라는 넉넉한 양. 실을 들고 서 있으니 내 옆을 지나가며 할머니가 말했다. 오, 색 예쁘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바로 옆 방에 이 실을 가장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즉시 9월 넘어 쌀쌀해지면 입기 좋은 조끼 가디건을 구상하고 뜨기 시작했다. 본인을 위해 뜨는 걸 아는지 할머니가 자꾸 관심을 보였다. 금방 뜰 테니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결과적으로 2주나 걸려버렸다. 할머니와 싸웠기 때문이다. 선물을 목적으로 시작한 뜨개는 상대를 향한 감정이 나쁘면 속도가 확연히 줄어든다.


노인과 싸웠다는 단순한 명제는 사실이지만 내게 불리한 말이다. 사실이지만 앞뒤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우선 싸운 얘기 전에 할머니를 알 필요가 있다.


1944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목전에 앞둔 6월의 어느 날. 할머니는 이북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다음 해 광복을 맞는 기쁨을 알기엔 갓난쟁이였던 할머니는 다섯 살 무렵 동생을 업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탓이다. 다행히 온 가족이 무사히 내려왔지만, 전라도 시골에서도 가난하긴 매한가지였다. 가난한 집 첫째 딸로서, 할머니는 초등학교 대신 밭으로 나가 농사를 지었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첫째 딸은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할머니는 까막눈으로 육십 년을 살았다. 눈 감는 날까지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예상치 못한 막내아들의 이혼으로 손주 둘을 떠안게 되었다. 별안간 떠안긴 손주 중 첫째가 나다.


나와 동생을 키우려니 까막눈이 문제가 되었다. 유치원에서 꼬박꼬박 받아오는 알림장을 읽을 수가 없었고 젖먹이 동생이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 접수를 할 수가 없었으니. 마침내 할머니는 글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동네 회관에서 한글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나이 60이 넘어 시작한 탓에 아주 느렸지만 결국 할머니는 한글을 깨쳤다. 어설픈 글씨와 어설픈 맞춤법이지만 읽고 쓰는데 문제는 없었다. 참 대단하다. 아마 나와 동생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눈에 실핏줄이 터지면서까지 한글을 배울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리사랑 하나만으로 나를 키운 할머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애증의 관계다.


44년생이 헤쳐온 세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 달랐다. 할머니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첫째 딸’ 지론을 고작 동생 한 명을 둔 내게도 적용했고, 나는 유치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동생을 내 딸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6살한테 2살짜리 딸이 생긴 셈이다. 동생을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었겠지만 그 의중을 알아채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더불어 할머니는 극도로 보수적인 가치관을 절대 바꾸지 않았다.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남녀는 유별하고 같이 있으면 문란한 거라는, 어른 말에는 이유 불문 복종해야 한다는 고릿적 시대관을 절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에겐) 불행히도 나는 보수적 양육이 통하지 않고 자라버렸다. 사람의 다양성을 응원하고 수용하고, 성별에 구애받는 역할은 없다고 생각하고 마는 그야말로 할머니의 대항마로 자라버렸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딸에게 온갖 제약을 걸어둘수록 그 딸은 온순한 아녀자가 아니라 닌자가 될 뿐이라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발한 변명과 핑계로 은밀히 놀러 다니는 어엿한 상급 닌자가 되었다. 할머니가 무얼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외박이란 그냥 친구네 집에서 떡볶이와 치킨을 시켜 먹는 일일 뿐인데, 그 사소한 걸 못하게 막으니 닌자의 기술이 늘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60년의 넘을 수 없는 세월이 있고 우리는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의견 차이를 좁히려 대화를 해도 종장엔 말다툼으로 끝난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관점에서 사건을 볼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봐도 우리의 다툼은 대개 할머니의 고집이 시발점이다.


지난주에도 할머니는 무단횡단을 하다 달려오던 차에게 욕을 먹었다. 차주가 소리를 질렀고 경적도 울렸다. 보행자 신호는 빨간색이었고 차량 신호는 초록색이었으니 차주는 잘못한 게 전혀 없었다. 갑자기 달려 나온 할머니 때문에 놀라서 핸들이라도 꺾어 사고가 났으면 어쩔뻔했나. 누군가 영상으로 그 모습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면 할머니를 욕하는 댓글이 수천개는 달렸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의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종종걸음으로 건너던 길을 마저 건넜다. 집에 들어오던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집에 들어가자마자 할머니와 싸웠다. 무단횡단 좀 하지 말라는 얘기를 10년째 하고 있는데 아직도 고치질 않는다. 그러다 “사고 난다, 위험하다”와 같은 얘기로는 꿈쩍도 안 하고 오직 한 마디로만 상황을 무마하려고 한다.


“평생 이렇게 살았어도 사고 한 번 안 나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왜 난리냐.”


사고가 났으면 내가 말도 안 하지. 80살 넘은 할머니가 무단횡단 중에 사고가 났으면 아마 나와 마주 보고 있지도 못할 테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빠는 알지도 못하는 어느 노인 이야기를 지어냈다.


“어떤 사람이 무단횡단 하다가 차에 치여 죽었는데, 보상금을 하나도 못 받고 그냥 그렇게 가버렸대. 무단횡단하면 사고가 나도 돈도 못 받아.”


어이없게도 할머니는 ‘보상금’에 충격을 받아 그 이후로 꼬박꼬박 신호를 지켰다. (정말 지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발견하지는 못했다.) 본인의 안위보다 금전 보상을 가장 우선으로 둔다고? 이게 맞아? 20년을 넘게 한집에서 살았는데도 나는 아직 할머니를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연유로 속도가 더뎠던 가디건은 마침내 어제저녁에 완성되었다. 5.5mm 바늘로 숭덩숭덩 떠내려가 품이 넉넉하다. 할머니는 원래 풍채가 좋은 편이었는데, 급성 당뇨로 한 번 고생하고 나서 살이 쭉 빠져버려 나와 비슷한 몸집이 되었다. 완성한 옷을 내가 먼저 걸쳐보니 할머니에게도 넉넉하니 잘 맞을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자려고 누운 할머니를 일으켜 옷을 건넸다. 할머니는 마다하지 않고 침대에서 나왔고 곧장 입어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어유, 예쁘다 예뻐.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나도 웃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마냥 웃을 수가 없다. 할머니가 좋고, 좋으면서 싫다. 아마 평생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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