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웃긴 뜨개일지
뜨개실을 정리하다 올 초에 떴던 목도리를 발견했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 완성했던 건데 날씨가 금세 더워지면서 몇 번 착용하지 못했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실 무더기 아래 깔려있었다니. 이러니 못 찾지.
케이블 무늬 (꽈배기 무늬)만 들어간 쁘띠 목도리인데, 이 목도리를 본 사람들은 전부 한마디씩 했었다. 예쁘긴 한데 너무 짧다. 예쁘긴 한데 색이 너무 칙칙하다. 예쁘긴 한데 너랑 안 어울린다. 예쁘긴 한데 우리 애가 더 잘 어울리겠다. (이건 차라리 달라고 얘기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예쁘긴 한데, 로 시작하는 말은 대부분 ‘너의 물건에 하자가 있음’을 돌려 말하는 말이다. 이 목도리는 내가 필요에 의해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들 그들은 어차피 듣지 않는다. 내가 만든 내 물건에 왜 남들이 지적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길고 화사한 목도리는 이미 옛날 옛적에 만들었다. 두툼하고 따뜻하고 폭신한 한겨울 목도리. 이번에 가지고 싶었던 건 비교적 얇고 흐느적거리는 느낌의 목도리였다. 패딩이나 코트 안에 두르고 다닐 목적이었다. 외투에 가려질 테니 슬쩍 보이는 부분도 포인트가 될 수 있게 케이블 무늬를 넣은 거고. 내 목도리에는 다 계획이 있었단 말이다.
짧긴 짧았다. 아마 시중에 파는 일반 목도리의 절반 길이 정도 되지 않을까. 근데 그건 불필요하게 몸쪽으로 내려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고, 누군가의 아이에게 넘겨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길이가 짧으니 우리 애 줘라, 라는 건 대체 어느 상식선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말을 한 건 종종 집에 놀러 오는 친척이었다. 만약 이 목도리가 마음에 드니 하나 떠줄 수 있겠냐고만 물어봤어도 흔쾌히 승낙했을 거다.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잦은 친척이었고 내가 불편해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친척 중 한 명이니까. 근데 예쁘긴 한데 짧게 잘못 뜬 것 같으니 차라리 우리 애한테 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무례했다.
내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혹은 구매한) 물건을 실수 (혹은 낭비)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웃고 넘겼는데, 반복되면 억울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필요성이 대중성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목도리는 길어야 하고 휴일은 쉬라고 있는 건데, 내 목도리는 짧으니까. 나는 휴일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니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를 들어 종일 휴대전화만 봤다거나 아주 긴 낮잠을 잤다거나- 밤이 된 날은 죄책감이 든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혼자 요약이라도 하든가, 손으로 계속 무언가 만들고 있어야 조금 마음이 편하다. 불편하지 않은 걸 보면 이게 내 나름대로 쉬는 방법인가 보다.
난 분명 잘 쉬고 있는데 꼭 가족들은 틈날 때마다 뜨개하는 날 보고는 좀 쉬라며 잔소리한다. 이게 쉬는 거라고 해도 아니란다. 내 상태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목도리를 탐냈던 친척에게는 죄송하다며 좋게 거절했다. 의도를 가지고 만든 목도리라는 걸 설명했어야 했는데 예의 없어 보일까 봐 그냥 실이 모자라서 짧게 끝냈다고 말했다. 실은 한 볼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이때부터 난 이 목도리를 흥 목도리라고 지었다. 누군가 첨언하면 흥, 하고 넘길 생각으로 유치하게 붙인 이름이다. 물론 나 혼자 생각만 하고 말겠지만.
거실에 뒀던 실 바구니를 방으로 옮기고 목도리도 옷장 속에 넣어뒀다. 다음에 집에 오게 될 누군가가 같은 소리를 할까 봐. 취미 생활도 눈치를 보며 해야 하다니. 온전히 혼자 즐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