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부터 사람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은 '내가 주변 사람을 왜 더 사랑하지 못했는가'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故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남긴 유서, "너희들에게 이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해 다오. 더 사랑해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접한 뒤 그 생각은 더 깊어졌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은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느끼는 대신, '더 받지 못해 억울하다'는 감각 속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평생 동안 타인을 사랑하는 일보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더 골몰했던 사람들이다.
왜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책임'이자 '의무'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오로지 '권리'일까.
이 질문에 단순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타고난 기질, 자라온 환경, 형성된 애착의 방식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조각된다.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이 향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랑 무능력자'라고 단정 짓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애초에 사랑하는 법을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운 적이 있는가.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온전히 사랑하기란 어렵다. 내면이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종종 타인을 인격으로 마주하기보다, 자신의 불안을 달래줄 무언가로 필요로 하게 된다. 이것은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 채워지지 않은 내면이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관찰이다.
그러나 이 이해가 곧 무한한 감내를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이 한쪽에서만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관계는 언젠가 그 사람을 소진시킨다. 그리고 소진된 자리에서는 진심 어린 사랑도 자라기 어렵다. 그러므로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남은 온기를,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관계를 위해 아끼는 일이다.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관계의 어려움은 어느 한쪽의 결함 때문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될 때도 많다.
글을 마치며, 지금 힘든 관계 속에 있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길 바란다.
그는 나를 '사람'으로 마주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서사를 완성할 '역할'로 필요로 하는가. 상대가 나를 찾는 순간이 언제인지 떠올려보라. 나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머무르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순간에만 내가 등장하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관계에서 사랑은 서로에게 흐르는가, 아니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가. '더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양쪽 모두에게 있는가. 아니면 한쪽은 늘 미안해하고, 다른 한쪽은 늘 덜 받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지금 이 관계에 쏟느라, 정작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제대로 있어 주고 있는가.
사랑은 무한정 공급되는 자원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껴 써야 할 소모품도 아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 순환이 끊긴 관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