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로 Feb 04. 2023

퇴사자들의 전략적 제휴 관계

오늘, 전에 다녔던 회사의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저까지 총 세 명이 모이고요.


우리 중에서 이제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J과장님, H대리님이었던 그녀들은 이제 저에게는 J언니와 H언니가 되었습니다.

회사가 아니니 더 이상 직급으로 부를 이유가 없으니까요.


우리 중 첫째인 J언니는 디자인 팀장, 둘째인 H언니는 디자인 팀원이었습니다.

마케팅팀에 있었던 막내 저에게는 옆 팀이자 협업이 굉장히 많은 팀이지요.


디자인팀은 회사에서 가장 안 쪽, 그러니까 사장님실과 가장 멀어서 회사 사랑방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업무를 하다가 지치면, 디자인팀에 놀러(?) 가서 간이 의자 펴 놓고 몰래 수다를 떨고 오곤 했습니다.

물론 갈 때는 일하는 척을 해야 하니까 파일이나 서류, 수첩 같은 걸 가지고 갔어요.

그래봤자 어차피 깔깔거리는 소리가 퍼지니까 다들 쟤들 노는구나, 하긴 했겠죠?




그러던 중 둘째 언니가 가장 먼저 퇴사를 합니다.

언니는 퇴사하고 개인사업자를 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어요.

4곳 정도의 클라이언트가 생겨서 퇴사한 후 1~2년 정도 영업을 하던 언니는 사업자 폐업 신고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해서 들어갔어요.

그리고 제가 퇴사를 했고, 그다음 마지막으로 첫째인 J언니가 퇴사를 합니다.



저와 둘째 언니는 모두 고양이 집사라 통하는 것이 많았고, 제가 언니 집에 자주 놀러 갔어요.

둘 다 회를 좋아해서 만날 때마다 80%의 확률로 회를 먹었습니다.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같은 팀에 있었어서 두 분도 퇴사한 후 꾸준히 연락을 하면서 지냈고,

저까지 셋이서 만나게 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퇴사자들이 모이면 무슨 얘기를 할까요?

당연히 그 회사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었던 영업 이사 험담

-지금이라면 (아니 사실 그 당시라도) 성추행으로 고소당할 법한 일들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예시를 들자면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 남직원들의 자리를 지정하여 배치도 만들기, 노래방 회식에서 블루스 추기 등.



사내 비밀 연애를 하다가 결혼까지 가서 아기 낳고 사는 부부 이야기

-그들도 이제 그 회사에 다니지 않지만요.

회사 근처 번화가에서 그들이 퇴근 후 데이트 하는 것을 목격한 직원들이 많은데, 끝까지 발뺌을 했습니다.

회사 복사기도 다 아는 비밀연애.



사이코패스가 의심될 정도로 직원들을 괴롭혔던 인사팀장 이야기 

-직원들 양말 가지고도 트집을 잡았던 사람입니다.

여름에 직원들이 양말을 안 신고 샌들을 신어서 발가락이 다 보인다고 남사스럽다며 양말 착용을 권고하였습니다.... 이 비인간적이고 패션테러에 가까운 조치는 무엇인지..?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요지경 회사에서 그나마 우리를 지켜줬던 자애로운 본부장님 이야기 

-타 본부에서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직접 나서 해결해 주시고, 아내가 만든 도자기 공예품을 하나씩 포장해 오셔서 모든 본부원에게 연말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받았던 것은 알록달록 예쁜 비누받이였어요!



이제는 우리가 다닐 때 보다 매출이 반토막도 안 나온다는 이야기 

-신사업을 하고 있는데 꽤나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회사를 떠난 지 수년이 지나 10년이 가까워지는데도 만나면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첫째 언니가 해준 팟타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깔깔거리고.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하고 서로의 얼굴을 봅니다.

퇴사자들은 모여서 그렇게 시시콜콜한 회사 욕을 하면서 오늘도 돈독해집니다.



근데, 왜 이렇게 모여서 그때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어찌 보면 차디차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회사라는 터전.

그 안에서도 서로 곁에 붙어 온기를 나누고 험한 전쟁터를 함께 이겨나갔던 마음 맞는 동료들이잖아요.

내가 정말 눈물을 삼키면서 힘든 일을 겪은 걸, 옆에서 다 보고 보듬어 안아준 고마운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너 힘들었지. 우리가 다 알아. 너 고생한 거, 우리가 다 봤어.



어쩌면 나의 고군분투를, 거센 폭풍우와 비바람을 맞서며 앞으로 나아갔던 나의 청춘을 알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퇴사자들은 서로를 위해주는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나 봅니다.


다음 봄을 약속하며 오늘 모임은 장장 5시간의 수다 끝에 막을 내립니다.



첫째 언니네 테라스에서 불멍



회사는 나왔지만, 사람은 남았습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작가의 이전글 으! 이 놈의 머리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