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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Aug 09. 2023

<네가 본 거잖아, 기억했어야지.>

Perfume

출근길 지하철 환승역,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역동적인 붓터치 만큼이나 온통 움직이는 사람들 뿐이라서 멈추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 하다. 


그런 사람들 틈새에서 움직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걷던 중에 뒤에 있던 사람이 나를 앞질러서 빠르게 걷는다. 나는 자리에 우뚝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에서부터 1층까지 내려간다. 9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는 하얀 셔츠의 남자를 삼킨다.


9층에서 1층까지, 9년같은 시간이 흐르고 엘리베이터는 남자를 토해낸다. 



나는 내리지 못하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멍하니 보고 있다.







눈과 귀는 둘 씩이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


눈에 담았던 그의 모습이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 지는 것도, 뜨거워진 휴대폰에 볼이 데일 것 같아도 한없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이제 기억이 나질 않는 것도, 왼쪽 눈은 오른쪽 눈에게, 왼쪽 귀는 오른쪽 귀에게 탓할 수 있다. 



<네가 본 거잖아, 기억했어야지.> 


그래서 더 빨리 잊는다. 



그런데 코는 정직하게도 하나 뿐이라, 탓할 수 있는, 책임을 미룰 대상이 없어서, 향기만큼은 잊지 못하고 묵묵히 기억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도서관의 색인카드처럼, 서랍이 닫혀 있을 땐 속에 뭐가 들어 있는 지 모르지만 열어보면 너무나 정갈하게 categorize되어 있는 것처럼, 같은 향기만 맡으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데, 수만장의 기억 속에서 단번에 너라는 페이지를 찾아버리는 스스로가 싫어진다.




너와 같은 향기가 머무는 곳에 나는 우뚝 섰다. 너를 닮은 향기가 지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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