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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Jan 02. 2023

우리 집엔 욕조가 없어서

본격 코로나 속 몸 담그기 프로젝트!

무명 건설사에서 만든 나 홀로 아파트 13층이었던 첫 신혼집, 그리고 4층에는 주인집이 사는 지금의 다세대 주택까지 우리 집엔 욕조가 없다. 욕조 없는 집들에서 만 3년을 살고 이제 4년 차를 목전에 두고 있다.



우리 집엔 아기나 노약자도 없고, 사실 청소하기도 귀찮거니와 공간 비효율적인 구조인 욕조는 원하는 옵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1년 열두 달 중에 딱 두 달, 12월과 1월엔 욕조가 간절해진다.



고장은 아니지만 어딘가 성치 못한 29년 된 골드스타 전기밥솥의 보온 모드가 시원치 않은 것처럼, 내 몸도 보온성 면에서는 아주 형편이 없다. 요즘 수지가 광고하는 K2니, 아이유가 광고하는 블랙야크니 하는 스포츠 의류 브랜드에서는 기능성 소재들도 잘만 나오던데. 내가 태어날 때는 <휴먼 기본 옵션> 중 하나인 보온성을 깜빡하고 출고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무렵, 몸은 어김없이 뻣뻣하게 굳어 병원 신세를 두어 번 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간절해지는 뜨끈한 탕 목욕! 대중목욕탕을 가면 되지 않느냐고? 코로나 이후에 내외한 지 3년 째다.



그래서 떠올린 아이디어는 바로 숙박업소. 국내 여행을 자주 가는데, 코로나 이전에는 욕조가 딸린 객실은 나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여행에서 먹을거리와 체험에 예산을 많이 배정하고 숙소에서는 최대한 아끼는 것이 나의 철칙. 흔히들 말하는 '인스타용 감성숙소', '오션뷰의 채광이 좋은 방' 따위는 철저하게 제외시키고 숙소를 골랐다. 내가 고른 숙소들의 리뷰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는..


"시골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고즈넉함" 이라던가 "오래되고 촌스럽지만 잘 관리된 객실" 등이다.



이토록 숙소에 큰돈 안 들여왔지만, 코로나 이후에 '욕조님'을 알현할 기회가 없다시피 하다 보니 '야놀자'와 '여기어때' 앱에서 검색을 할 때 욕조 필터를 설정하게 되었다.



부산 여행 때 묵었던 숙소



커피 포트에서 방금까지 팔팔 끓으며 집 안에 구름을 만들던 물은 찻잔 속에 들어간다. 동서 녹차 티백을 하나 꺼내 물에 푹 담근다. 넣자마자는 너무 뜨거워서 탕 속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티백이 찻잔 위에 둥실 떠서 고집을 피운다. 이내 열기에 녹진해진 티백은 꼬르르 찻잔 속으로 스르르.


바로 이 티백처럼, 숙소의 팔팔 끓는! 욕조에 몸을 담그는 순간!


여독은 물론 속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존재했던 응어리까지 배쓰밤 녹듯 촤아-하고 녹아 없어진다.



2020년 12월, 큰맘 먹고 인천 송도 오크우드 호텔에서 욕실이 딸린 대단히 좋은 숙소를 예약했다. 별이 다섯 개! 장수 돌침대도 아니고 진짜 찐 5성급 호텔이라니. 여태까지도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소중한 경험. 결혼 1주년 기념 및 연말을 멋지게 보내고 싶었다. 호텔 로비에서부터 엄청난 규모의 아름다운 벽 장식에 감탄! 5성은 다르긴 다르구나. 다리 길게 찍어 달라는 요구를 하며 사진을 오백 스물여섯 장 정도 찍고, 연말과 코로나가 맞물린 호텔 특수 때문에 체크인 대기 시간만 30분이 넘었지만 화는커녕 기대만 커져갔다. 입실하자마자 사진 잔뜩 찍고, 노을 보면서 목욕 한 번 하고, 깜깜한 밤이 되면 야경 목욕 또 한 번 해야지!





블로그에서 5일 동안 검색을 거듭해 찾아낸 나의 '완벽한' 객실, 그리고 욕조는 상상을 뛰어넘는 자태를 뽐냈다. 와, 나 이런 데 자주 오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는데? 레지던스 객실이라 준비해 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었다. 세상에, 벽장이 아니라 드레스룸 같은 공간이 따로 있네. 계획대로 욕조에 바로 물을 받음과 동시에 남편을 괴롭히며 여러 포즈를 연구해 자랑용 사진을 잔뜩 찍었다. 물이 어느 정도 차오르는 소리가 들려 한껏 기대를 안고 핸드폰 재즈 어플에서 색소폰 재즈 재생 완료! 손에 쥐고 욕실로 입장을 하는데....!



엥?


엥?


내 노을 야경 어디 갔지? 욕조 야경 맛집 어디 갔지?



현실은 수증기가 가득 차서 통창 밖은 내다 보이지도 않는다. 어릴 적 겨울 아빠 차에서 창문에 입김 하 불고 손가락으로 하트 그리는 것처럼, 욕조가 커다란 주둥이를 벌리고 온 힘을 다해 창문에 입김을 하 불어버렸다. 아니 지금도 불고 있다. 뜨거운 물이 콸콸콸, 수증기가 학학학!



어디 이렇게 멋지고 멋진 숙소를 와 봤어야 말이지. 바깥 야경을 보면서 욕조에서 멋진 목욕, 할 수 없었던 거구나! 내가 문과라서 이걸 몰랐던 걸까!? 아니면 고1 공통과학 시간에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했으면 이렇게 기대가 무너질 일은 없었을까!



반대로 따져보면 밖에서 안이 보이지는 않겠군. 참으로 프라이버시를 위한 수증기 인테리어가 아닌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젠장. 어차피 여긴 47층이고 앞에는 텅 빈 시티뷰라 아무도 발가벗은 내 몸뚱이를 볼 사람이 없는데.



로망이자 버킷리스트였던 '야경 보며 우아하게 목욕하기'는 그렇게 인천 앞바다로 물 건너갔지만, 고급 자재로 보이는 욕실에서 재즈를 들으며 꼬르르 물에 잠기는 경험은 아무래도 좋았다. 5성급 호텔의 통창 욕실이든, 시골 관광지의 촌스러운 모텔의 낡은 욕조 속이든,



우리 집엔 욕조가 없어서

앞으로도 욕조 원정은 계속될 것이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1월 3일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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