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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thereming Aug 05. 2024

아름다운 곡을 들려줘서 고마워

40일 유럽여행, D+6

The Gloomy City, London.

어김없이 비가 온다.

'런던에 왔으니 남들이 다 가는 건

다 가봐야 하지않겠어?'라는 생각으로

숙소를 나서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향한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성당에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든 생각.

'쓰읍... 난 좀 별론데...?'

성당이라, 그것도 "대성당"이라고 하는데

전혀 감흥이 없다.

뭐랄까 형형색색, 화려한, 웅장한, 압도적인 느낌도

없이 생각보다 더 단출하다.

그리고 칙칙하다.

성당이 런던 같다.

런던을 꼭 빼닮은 무채색의 성당에 들어간다.

오디오 가이드를 받고 성당을 구경한다.

헤맬 것도 없는 성당을 헤매며 성당을 둘러본다.

그리고 잠깐 신부님이 기도와 미사 하는 모습을 본다.

많은 관광객들이 있다.

나는 기도를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워진다.

그리고 눈치를 보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남의 시선, 눈치 보지 말고 좀 더

자유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5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정말 나의 생각과 의견을 듣지도 않고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다는 것을

수치스러울 정도로 깊이 깨달았다.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애쓰며 눈치 보는 내가 너무 싫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로 사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살다 죽을 것만 같았다.

기도를 마치고 성당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여전히 큰 감흥은 없지만 지하, 2층, 3층

그리고 꼭대기도 올라간다.

올라가는 계단이 나선형에 폭도 너무 좁다.

겨우겨우 험한 말을 삼키며 전망대에 도착한다.

비가 쏟아진다.

아까 필름 장수를 봤을 때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새 필름을 가방에서 뒤적인다.

그리고 전망대 안내원은 여기 서 있지 말라고 하며

자리를 옮길 것을 요구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맞는 말 한

안내원에 나도 모르게 정색한다.

그래도 꼭대기에 올라왔으니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로 한다.

사진을 찍는데 "철컥", 필름이 다 감긴 소리가 난다.

그렇다.

필름 한 롤을 다 쓴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다지 멋지지 않은 전경에 필름 한 장 값을 아낀다.

다음 일정을 하러 서둘러 내려간다.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졸음이 아주 쏟아진다.

졸음에 못 이겨 어느새 두 눈은 감겨 있었고 감았던

눈을 번뜩 떠보니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서

두 정거장이나 더 가 있었다.

얼른 내려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가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점심들을 훌쩍 넘은 시간에 웨스트민스터 성당

구경이라는 지적 호기심보다는

원초적 욕구를 따른다.

영국의 적고 소중한 맛집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한참을 헤매다 웨스트민스터 시청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뷔페식, 샌드위치, 커피&드링크.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카페존에 가서 직원에게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한다.

직원은 접시에 담아오라고 한다.

나는 탄산음료 하나와 컵케이크 하나, 샌드위치 하나를 접시에 담는다.

결제를 한 후 자리를 찾아 앉는다.

음식을 먹으며 글도 쓰고 다 쓴 필름도 새

것으로 교체한다.

배도 차니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피아노 한 대가 생각난다.

그 피아노를 본 순간부터 이미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고민고민하다가 피아노를 쳐봐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께

피아노를 쳐도 되는지 여쭤본다.

흔쾌히 "Of course!"를 외쳐주신 덕분에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가게가 작은 규모는 아니었고 아까 먹으면서

다른 사람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정도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떨리는 이유는 '망칠까봐', 내가 내는 소리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게 듣기에 좋지 않을까봐'가

가장 크다.

오랜만에 치는 피아노, 나는 까먹은 음표들을,

손의 움직임을 더듬더듬 기억하며 피아노를 친다.

몇 곡을 치고 영국에 왔으니

영국의 국민 가수 Adele의 Someone like you도

쳐본다.

나는 가사를 마음속으로 흥얼거린다.

영국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완벽히 끝낸 곡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속상하다.


피아노 옆에서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이제

가게를 나서려고 일어나신다.

그런데 할아버지 한 분께서 나의 등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혀 나에게 말씀하신다.

"Thank you for your beautiful songs"

(아름다운 곡들을 들려줘서 고마워요)

내 등에 전해지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그리고 다른 할아버지 한 분께서도

나에게 고맙다고 하시며

질문 하나를 하신다.

"Are you regularly hired here?"

(여기에서 정기적으로 일하나요?)

피아노를 치다 황급히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No, I'm not."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나도 "Thank you so much"라며

감사의 표시를 전한다.

할아버지들이 떠나신다.

그렇게 나의 망한 연주.

나는 부끄러워 도망치듯 식당을 뒤도 옆도

보지 않고 나온다.

나는 창피함에 몸부림친다.

그래도 여기선 나 혼자이지 않은가.

나라도 나에게 말을 해주어야 한다.

"잘했어. 잘했어. 도전해 봤잖아?

그거 하나면 된 거야."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걸으며

미친 사람처럼 읊조렸다.

도전 자체가 잘한 거라고 틀려도 괜찮다고

나 자신을 토닥였지만 계속 창피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꽤 많은 사람이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나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 것,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영국 런던에서.

생각해 보니 나로선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 진정되니 카페테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피아노 소리가 망하고

실수한 연주가 아닌

그저 아름다운 멜로디로만

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이들에게 나의 연주는

비 오는 어느 오후 귓가에 들리는, 스쳐 지나가는

멜로디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나의 연주는 오래된 친구들과의

만남 속 로맨틱한 BGM이 되어

하나의 작은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나의 연주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못 들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나의 연주는 "내가 더 잘 치는데?"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나의 연주는 도전,

어쨌든 "해냄"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으로 향한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간 성당 안은 평화로웠다.

한 구역에 조용히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무릎을 꿇고, 휠체어에 앉아

각자만의 방식으로 기도를 드린다.

나도 그 옆에 앉아 기도를 한다.

오늘 아침에 했던 기도를 하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는다.

성당에서 나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한다.

사원에 도착해 입장하려고 사원으로 들어가려는데

경호원이 막아서며 말한다.

"Today is closed"

내 앞사람은 들어갔는데, 내 앞에서 잘렸다.

아니, 방금까지 들어갔잖아!

여행을 다니다 보니 툭하면

"이거 인종차별 아냐?"라는

피해의식과 의심이 생겼다.

그렇게 돈을 날려 아까워한다.

하지만 돈 아까워 한탄할 시간도 사치다.

아직 나에겐 내셔널 갤러리 일정이 남아있었다.


서둘러 내셔널 갤러리로 향한다.

그리고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가 미술관을 헤매며

가장 보고 싶은 작품 모네와 고흐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종교적 의미가 있는 작품,

다양한 초상화를 본다.

작품에 매료되어 열심히 보고 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모네와 고흐의 작품이 있는 방에 도착한다.

역시, 거장들 아니랄까 봐.

방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멀리서 작품을 보다 사람이 빠지면 작품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가까에서 작품을 감상한다.

고흐의 생동감 있는 붓터치,

모네의 아름답고 따뜻한 색채,

잔 트롭의 역동적인 묘사

모두 멋지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과 그 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더 멋지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미안하지만 그들의 집중하는 뒷모습을

몰래 찍는다.

마감시간이 다가와 내셔널갤러리를 나온다.

잠시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차가운 대리석 벤치에 앉는다.

내 앞에 10명 지나가면

숙소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10번째 사람이 지나가고 버스를 타러 간다.

버스를 타기 전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한 후

숙소로 향한다.

며칠 전 나는 이 시간에 숙소에 들어가기가 너무

아깝고 아쉬워 런던 거리를 거닐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이대로 숙소에 가도 좋을 것 같다.


It's enough already, innit? ;)


2024.03.12.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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