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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theremingd Aug 01. 2024

이름은 모르지만, 행운을 빌어요!

40일 유럽여행, D+5


전날 밤,

D가 먼저 브라이튼&세븐 시스터즈에 갔다 왔다.

날씨도 너무 좋고 분위기도 좋다고 하면서

나에게 꼭 가보길 추천했다.

D는 한 블로그에서 간 방법으로

홀로 브라이튼을 갔다고 했다.

나도 이전에 D가 본 블로그를

본 적이 있었다.

런던 근교로 가는 브라이튼&세븐 시스터즈는

보통 동행을 구해서 차를 타고 가거나,

당일 투어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돈을 들여서 가고 싶지 않았기에

D의 후기와 블로그에 의존해

홀로 브라이튼에 가기로 한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숙소를 나온다.

비가 올 것 같은 햇빛 하나 없는 날씨다.

복솔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런던 지하철은 데이터도 와이파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캡처해놓은 지도를 보며

빅토리아 역으로 향한다.

런던에 며칠 동안 있었지만

자꾸 지도를 캡처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어느새 빅토리아 역에 도착한다.

열차 시간이 조금 남아 역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 하나를 산다.

그리고 브라이튼행 기차를 탄다.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좌석

창가 쪽 자리에 앉는다.

기차가 출발한다.

내 앞에는 4, 50대로 추정되는

시크한 차림새의 영국 아주머니가 앉았다.

내가 입을 가리고 크게 기침을 하자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기분이 별로였지만 창밖 풍경에 집중한다.

얼마 지나서 역무원이 열차 칸으로 들어온다.

아뿔싸. 나 티켓 예매를 안 했잖아?

'내가 왜 티켓 예매도 안 하고 탔을까?'

라는 생각이 들 새도 없이

기차 티켓 구매 방법을 찾으려고

네이버에 검색한다.

이미 티켓 구매는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역무원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현장 결제하기를

결정하고 차분히 차례를 기다린다.

역무원이 다가와 티켓을 보여달라고 한다.

나는 세상 죄송하다는 표정과 함께

현장 발권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알겠다고 하며

현장 결제를 해준다.

당황했지만, 그리고 돈도 좀 더 들었지만

남은 여행을 위해 이 일은 잠시 잊도록 한다.

브라이튼역에 도착한다.

역에서 나와 세븐 시스터즈로 가는 버스를 탄다.

길치, 방향치인 나는

어딜 가나 구글맵이 필수인데,

구글맵은 이런 나의 마음도 모르고

항상 반응이 늦다.

이층 버스를 탔다.

운이 좋게 이층 맨 앞자리가 비어 있어

뻥 뚫린 도로와 해안가를 보며

세븐 시스터즈로 향한다.

그리고 블로그에 하차해야 하는

정류장에도착한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나만 내린다.

'이거 맞아...?'라는 표정으로 내리는데

버스에 남아있는 승객들 표정도 나와 똑같다.

가루비가 내리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주택가여서 마음에 안심이 된다.

구글맵 목적지에 ‘East Dean Garage’를 친다.

'도보 30분 소요'라고 뜬다.

30분쯤이야.

주택가에서 세븐 시스터즈로 가는 길로 들어간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큰 도로를 끼고 울창한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이 가득하다.

축축하고 스산한 느낌이 든다.

아무 사람도 없이, 가끔 쌩-

하고 지나가는 몇몇 차들만 있다.

내 머릿속엔 이 길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스러움이 가득해진다.

도로 옆 인도로 걷고 있는데 인도마저 끊긴다.

되돌아가는 것도 답이 없는 것 같아

구글맵에 목숨을 맡긴 채 가던 길을 간다.

지나가는 차가 뿌리는 빗물들을 피하며

겨우겨우 초원으로 들어간다.

허허벌판 드넓은 초원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다.

영드에서만 본 시골 목장에 들어온 듯하다.

다만, 장르는 공포물이다.

초원이 너무 드넓어 멋있기도 하지만

데이터가 자꾸 터지지 않는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내 뒤엔 어느새 커플로 추정되는

두 명의 여행객이 따라온다.

뭔가 내가 앞에서 잘 인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계속 가다 보니 어느새 세븐 시스터즈에 도착한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보아하니 잘 찾아온 듯하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향한다.

세븐 시스터즈의 경관을 보며

이곳에 꼭 와 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사진에서는 맑고 멋있는 해안절벽이었는데

내가 보는 세븐 시스터즈는 흐리고

해안절벽 멀리까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연은 항상 아름답다는 진리는

흐린 안개를 뚫고 나온다.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고

해안절벽 아래 해변으로 내려간다.

한 외국인 관광객 가족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사진을 열심히 찍어준다.

나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확인한 사진에서 발견된 4등신이 된

나의 모습을 보고 말없이 사진을 끈다.

사진을 다 찍고 영상통화를 하려는데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다.

벌써부터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게 걱정된다.

와이파이를 사용하러

아까 지나가다 본 카페로 향한다.

카페에서 핫초코 한 잔을 주문하고

와이파이를 연결한다.

진흙을 밟고 미끄러지며 걸었던 탓에

나의 흰 바지는 이미 진흙 투성이었고

나는 벌써 피로했다.

그리고 다시 30분을 걸어나가

버스를 타야 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비싼 물가 때문에 우버는 생각조차 안 했지만

우버를 불러본다.

하지만 우버도 오지 않는다.

일단 카페에서 시킨 핫초코를 홀짝이며 마신다.

그러다 내 대각선 자리에 한 동양 여자가 앉아

샌드위치와 음료를 마시고 있는 걸 본다.

나는 기회임을 직감한다.

홀로 버스 정류장에 갈 자신이, 용기가 없었던 터라

국적에 상관없이 일단 동행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부끄럼에 기회임을 알면서도 한참 고민한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나?

용기 있는 자가 동행을 구한다!

나는 그 동양 여자 A에게 가서

어깨를 조심스레 톡톡 치며

"Excuse me?"라고 말한다.

"Are you Korean?"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어팟 한쪽을 빼며 A는 "네?"라고 대답한다.

안도감과 반가움이 공존한다.

아무리 봐도 세븐 시스터즈에 한국 사람은

우리 둘뿐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갈 수 있는지 물어본다.

A는 흔쾌히 수락하고 사진도 더 찍자고 한다.

A가 나에게 자신이 시킨 빵을

먹어보라고 권유한다.

"이 빵 되게 맛없어요! ㅋㅋ

그래도 한번 드셔보실래요?"

정말 맛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되도록 사 먹지 말아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A가 알려준

세븐 시스터즈 사진 명당자리로 향한다.

계속 혼자였다면 안 갔을 텐데,

A 덕분에 멋진 경치도 보고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역시 사진은 한국인에게 부탁해야 한다.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우리 앞엔 중국인 모녀로 추정되는

여자 두 명이 있다.

함께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여유롭게 둘러본다.

똑같은 길로 가는데 양들이

이렇게 많은 줄 아까는 몰랐다.

그리고 이 도로와 초원이 얼마나 멋진지 느껴졌다.

여유가 있어야 주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음을 몸소 깨닫는다.

가는 길에도 사진을 여러 장 찍는다.

한 중간쯤 갔을까?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선다.

영국인 아주머니가 말한다.

"Are you going to the bus stop?

I can give you a ride there.

Do you want to take it?"

("버스 정류장으로 가세요?

거기까지 태워다 줄 수 있는데,

타실래요?")

나와 A는 동시에 눈을 맞춘다.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을 백 번쯤 하며

기뻐하며 자동차에 탄다.

나는 흔쾌히 우리를 태워주신 아주머니께

내 가방에 있던 한국 크림빵을 건넨다.

아주머니는 괜찮다며 거절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두 마디에 한번 꼴로 감사하다고 한다.

자신의 남편이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끝까지 "Thank you sooooo much"를 연발하며

"Have a good day"로 마지막 인사를 한다.

버스를 기다린다.

이번에도 이층버스 앞자리에 앉는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서도,

우연히 얻어 탄 차에서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함께"라는 안전함 속에서

특별한 추억과 즐거움을 경험한다.

브라이튼역에 도착한다.

우리는 갈 길이 다르다.

내가 타야 하는 열차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A가 타야 하는 열차가 곧 출발한단다.

우리는 급하게 헤어진다.

우리는 서로 남은 여정의 행운을 빌어준다.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2024.03.11.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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