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쥔 손에 땀이 맺혔다.
벨이 두 번 울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듣던 목소리였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그 말투가,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졌다.
처음 그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했다.
어조는 차분했다.
그런데 말과 말 사이가 어딘가 비어 있었다.
숨이 한 박자씩 늦었고, 그 틈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내가 은행 직원과 직접 통화했다고 말하자, 전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회사에서 일이 좀 터졌었어…”
그 뒤로 이어진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다.
변명인지, 사실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는 결혼 전에 빚이 있었고, 그 사실을 숨긴 채 내 손을 잡았다는 것.
잊고 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게.”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았던 날이었다.
그때의 미소, 확신에 찬 눈빛,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믿고 있던 그때의 나.
그 순간들이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임신 9개월.
배는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아이가 안에서 움직였다.
작은 파동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내 몸 안에 남편과 나의 아이가 있다.
그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남편은 나를 속였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단순한 사실인데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 안에서 돌처럼 굴러다녔다.
삼키자니 아플 것 같았고, 뱉어내기엔 이미 너무 늦은 말 같았다.
집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그 사이로 아이가 한 번 움직였다.
그 감각이 잠시 나를 붙잡아 두었다.
곧 태어날 아이.
그 아이를 안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긴 할까.
머릿속에는 아무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선택지도,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곳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모든 힘이 빠졌다.
몸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서, 그대로 침대 속으로 가라앉고 싶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올 것 같아서.
그러면 엄마가 더 아플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